생명이 흘러 나가야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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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한 많은 일꾼들이 있지만 생명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당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흥왕했던 일들을 볼 수 있지만 시간의 시험이 지났을 때 퇴색해버린 많은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했던 모든 말과 수고에 대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4:10-12, 고후 5:10). 그 때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은 어떤 일일까요? 우리가 그것을 지금 알 수 있다면…
1. 생명이 흘러 나가야 참다운 봉사이니
생활과 일 하나돼야 참 열매 맺게 되네
우리의 육체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열심을 낼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이 될 수 있습니다(마 9:14, 마 12:2). 우리가 종교적이 될 때 주님이 생명 안에서 무언가를 역사하시기는 어려우며 주님은 불가피하게 출로를 위해 ‘처녀지’를 찾으실 수밖에 없게 됩니다(마 4:15-19).
예루살렘에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인식과 경배와 성경에 능숙한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주님이 갈릴리로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는 종교가 생명과 가장 대립되며 심지어 생명을 반대하고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에 익숙한 사람은 많아도 그에게 ‘별’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마 2:2).
산 체험 안의 말씀이 사람을 살려 내니
체험과 일치되어야 능력의 말씀이라
주님이 갈릴리로 가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님이 그들을 사용하시기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생명 안에서 더 이상 길을 내어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가피하게 갈릴리로 가시는 것이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그분의 원함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주님께 패역했을 때 주님이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감람산으로, 감람산에서 하늘로 그분의 영광이 떠났을 때 그분은 마치 가시기를 원치 않지만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처럼 천천히 종교의 중심지를 떠날 것입니다(겔 9:3, 겔 11:22-23).
2. 그 영의 생명 열매가 참다운 사역이니
포도나무의 열매는 생명의 풍성일세
만일 성경에 능숙하고 교회 생활에 익숙하며 무언가 아는 것이 많음에도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제쳐두고 성경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에 대해 깊은 인식도 없는 사람을 통해 무언가를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종교성’에 대한 경고로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마 2:1-12).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기나 긴 처리의 과정을 지식적으로만 알 뿐 체험적으로 통과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흘러 나가는 참다운 봉사가 없게 되며 사람을 살려 내는 산 체험 안의 말씀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외면적으로 사람들을 돕고 격려할 수는 있어도 참다운 사역인 그 영의 생명 열매는 없게 됩니다.
주 나를 통해 역사해 그 생명 표현하고
그 생명 모든 풍성을 날 통해 나타내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은 우리의 존재가 새롭게 되고 변화된 만큼 갈 수 있습니다(요 15:4-8). 그 안에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도 없고 경쟁도 없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 어떤 느낌의 교통도 주관적으로 받지 않게 되며 따라서 모든 것을 열어 놓고 교통할 수 있게 합니다(빌 1:15-18).
우리가 이러한 상태일 때 몸 안의 실재인 교통의 영이 있게 되며, 부담이 있어도 무언가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이상 없게 됩니다. 그 안에는 많은 교통과 대화가 있지만 그 결과 몸의 느낌인 그 영의 인도를 만질 수 있게 하며 주님이 하나의 출로를 얻으실 수 있게 합니다(빌 1:5-7).
3. 사람의 운동 아니요 성령의 감동일세
바깥의 업적 아니요 이면의 역사일세
인도자가 이러한 사람일 때 그와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은 안의 느낌이 있을 때 자유롭게 안의 부담을 교통할 수 있게 됩니다(벧전 5:3). 교통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것보다 그러한 부담을 교통하는 것 자체가 그의 부담일 수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만이 일보다 생명을 더 주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일의 성취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오히려 교통이 더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의 성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이면에는 그가 아직 많은 처리를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사업 아니요 생명의 유출이니
날 위한 수고 아니요 주 표현하는 걸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할수록 우리는 일보다 생명의 해방을 더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요 12:24).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함양했는가 보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를 통해 흘러가신 정도를 더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이 흘러간 정도만큼 그 일이 주님에게서 나온 일이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임을 입증합니다(마 7:14, 17).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해 주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흘러 나간 것이 미미하다면 그 일은 주님께 속한 주님이 인정하시는 일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마 7:21-23).
4. 내 계획 노력 버리고 내 목적 버리겠네
주 나를 통해 역사해 주 뜻만 이루도록
생명 안에서 성장한 사람만이 자신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주님의 부담을 쉽게 만질 수 있고 또 그것을 붙잡지 않는 육체의 처리가 있기 때문에 교통의 영도 자유롭게 흐를 수 있습니다(창 22:2, 12).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행하려는 자신의 노력도 없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일을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것 같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무언가를 하는 생명 안에서의 능동-수동, 주님과의 연합된 상태 안에 있게 됩니다(아 5:2). 그는 수고하지만 ‘땀’을 흘리지는 않으며(겔 44:17) 그것을 자신의 목적이 되게도 하지 않음으로 언젠가 주님이 요구하실 때 그의 사랑스런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내 어떠함과 소유를 다 죽음으로 넘겨
주 나를 통해 사시어 주 풍성 표현케 해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외면적으로는 처녀가 아이를 잉태한 것과 같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심지어 비난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마 1:19). 주님이 생명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그분을 잉태하는 것은 어떤 영광이면서도 외면적으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은 종교적인 상황에서는 참으로 좁은 길이고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길이며 영광과 모욕, 악평과 호평을 받는 길입니다(고후 6:8). 그 길은 참으로 ‘번제’가 되는 길이지만 부활 안에서 주님은 나를 통해 사시어 그분의 풍성이 표현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 오늘날 주님과의 생명의 접촉이 없이 그분을 밀고 당기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모든 종교성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눅 8:42-44), 모든 것이 익숙하고 능숙하지만 주님이 더 이상 역사하실 수 없는 예루살렘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처녀지인 갈릴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계획 노력 목적을 버림으로 성경을 알 뿐만 아니라 주님의 별이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어떠함과 소유를 다 죽음에 넘김으로 주님을 잉태하고 그리스도를 낳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생명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 이 찬송은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655장입니다. 가사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에 의해 지어졌고 곡은 George Coles Stebbins에 의해 붙여졌습니다.
* 우리가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찬송을 해야 될 때 어쩌면 그 영을 주의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방면만을 주의할 수도 있습니다.
* 우리는 모든 것에서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정작 영은 거의 없는 찬송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 그러한 찬송은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 안에서 장려되어 왔고, 고상하고 무언가 높은 수준의 찬양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경배’는 아닐 수 있습니다.
* 오늘날 주님이 원하시는 찬송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든 제단에 우리가 천연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끝난 제단이 있는 찬송인지도 모릅니다(출 20:24-25).
* 사람은 서로 다른 수준의 계단을 만들려고 하지만(출 20:26) 우리의 할 수 없음과 능력 없음과 자격 없음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부활 안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그 영이 있는 경배자들이 될 것입니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 http://www.btm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