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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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의 신론은 이단적이고 기독론은 비성경적이다"
이단감별사 최삼경 목사(빛과소금교회)가 삼신론 논란과 월경잉태 이단사상 등으로 큰 물의를 빚고 있다.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 논란은 과거 최 목사가 이단으로 정죄한 지방교회와의 지상논쟁 가운데 촉발됐다. 최 목사는 90년대 말 그가 현재 상임이사로 있는 '교회와신앙'에 지방교회와 12차례 이상 신학적인 논쟁을 펼쳤고, 그 과정 가운데 삼신론자임이 들통나 논란이 거세지자 일방적으로 지상논쟁을 접었다. 본지는 당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 논란이 어떻게 촉발됐는지 이해를 돕고자 지상논쟁 전문을 개제한다. 마찬가지로 최삼경 목사가 자신에 대한 변론과 반론을 더 원한다면 본지는 언제든지 수용해 독자들에게 전달할 방침이다.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1)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2)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3)
지방교회와 논쟁 중 드러난 최삼경 목사의 삼신론(4)
우리는 이번호에서 최삼경 목사가 쓰고 있는 ‘파란 안경’(수건)이 무엇인가를 밝힌 다음 그의 이단적인 신론을 다시 한 번 지적할 것이다. 그 다음에 본론으로서 인간론과 교회론을 다루고자 한다.
I. 지난호와 관련하여
1. 최삼경 목사가 쓰고 있는 ‘파란 안경’은 무엇인가?
지난호에서 최목사는, “필자가 쓴 장로교의 안경이 어떤 것인지 밝혀주기 바란다”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하여 답변하겠다.
‘삼위일체’에 관한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최삼경 목사는 ‘양태론’이 틀렸고 ‘신인합일주의’가 이단이라는 자기의 신학이론은 충실히 주장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목사는 자신의 주장이 어떤 성경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그리고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성경의 어떤 부분에 비춰볼 때 틀렸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치 못했다.
이것은 최목사가 지금까지 말씀 자체가 아닌 자신의 신학지식에 근거하여 토론에 임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성경 말씀’을 대치하는 최목사의 ‘신학지식의 틀’이 바로 최목사가 쓰고 있는 파란 안경(수건)인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지방교회측은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분명한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가진 정통신앙임을 충분히 변증했다(96년 9월호, 161-162쪽 참조). 다시 한 번 성경적 근거를 보기로 하자. 우리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요 1:12-13, 3:5-6, 16)을 볼 수 있다. 특히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연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말씀(하나님)이 육신(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성육신 (요1:14상)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것은 ‘교회’에 관한 말씀에서도 볼 수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는 그(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니’ (엡 1:23)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님의 몸’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비밀스런 연합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로마서 12장 5절은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이외에도 많다. 그러나 지면의 한계상 이 정도의 인용만으로도 독자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진리가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역사적 근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인 클레멘트, 아리우스의 이단을 대항하여 정통교리를 수호한 아타나시우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네우스 등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이외에도 마르틴 루터, 존 캘빈, 존 번연, 마담 귀용, 허드슨 테일러, 존 넬슨 다비, 아돌프 사피어, 앤드류 머레이 등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가르쳤다.
특히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까지 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신격(Godhead)(골 2:9), 즉 경배받는 위치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와 몸이 동일한 사람의 생명과 사람의 본성을 가졌고 머리도 사람이요 몸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몸=머리’ 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과 같은 이치이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요일 5:11-12)과 하나님의 본성(벧후 1:4)과 하나님의 형상(고후 3:18)에 참여할 수는 있으나 경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행 14:11-15). 이것이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말하는 근거요 내용이요 이유이다.
이상의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통하여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정통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목사는 ‘장로교 신학지식의 틀’이라는 파란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통진리가 ‘신인합일주의’로 보인 것이다. 지방교회측은 최목사의 이러한 잘못된 신론을 바로잡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96년 10월호, 97년 3월호). 다행히도 97년부터 최목사는 더 이상 ‘신인합일주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삼경 목사가 진심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양심적인 ‘이단연구가’라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의 어느 부분에 오류가 있는지를 성경에 근거하여 비판하든가 아니면 위트니스 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사과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우리의 지적은 최목사의 말처럼 자신이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신학의 입장에 서 있으니 이제는 개신교의 보편적 ‘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신교’ 내에서는 그것이 보편적인 교리일지 모르지만 ‘천주교’나 ‘동방정교’ 입장에서는 보편적이지 않을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단적인 교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최목사가 ‘장로교 신학의 틀’에서 나와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인 ‘성경 자체’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최삼경 목사에게 권면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인식하고 절대적인 성경적 관점을 취해야 할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7월호, 159쪽).
2. 최삼경 목사는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토론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최삼경 목사가 쓰고 있는 용어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그 중에 일부가 ‘정통교회’라는 말과 ‘이단’이라는 말이다.
차례로 비판해 보자.
(1) ‘정통교회’, ‘개신교회’, ‘기성교회’라는 표현에 대하여
최삼경 목사는 토론 초기에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를 ‘정통교회’라고 표현했었다. 그래서 우리측이 그 ‘정통교회’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라고 요구하자 최근에는 ‘기성교회’ 또는 ‘개신교회’ 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최삼경 목사는 ‘개신교회’가 ‘정통교회’라는 말인가? 아니면 개신교회가 정통교회라는 주장을 바꾼 것인가? ‘정통교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최목사가 그 단어를 사용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반드시 소위 ‘정통교회’의 정의를 내려주기 바란다. 우리는 97년 3월호에서도 동일한 질문을 했으나 최목사는 아직까지 침묵하고 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천주교에 대한 최목사의 입장을 함께 밝혀주면 좋을 것이다.
아울러 교회사에 익숙치 않거나 위트니스 리의 신앙적 배경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의 말을 하고자 한다.
역사적 교회는 편의상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초대교회(사도시대교회), 천주교회(구교), 개신교회(신교) 등이다. 초대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의 원형이었으나 천주교회를 통해 교회는 그 원형에서 멀어졌다. 이에 반발하여 개혁을 외치고 별도의 교회형태를 갖게 된 것이 개신교이다. 그런데 이 개신교 내에서도 주장하는 개혁의 정도에 따라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로 분류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다만 구교로부터의 개혁에 만족치 않고 더 근본인 성경자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종교문제 연구가인 고오든 맬튼 박사는 지방교회를 근본주의 범주로 분류하고 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고오든 맬튼 박사는 ‘근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자.
“근본주의는 19세기 초에 개신교 안의 한 보수주의적인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사회학에서부터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지적인 사상의 새로운 흐름의 다양성을 흡수해 온 소위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의문시 되어온 몇 가지 필수적인 그리스도인의 교리에 대하여, 성경적인 권위와 신실성을 확증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근본주의로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교사이자 신학자인 존 넬슨 다비(1800-1882)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182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한 그 운동은 초기의 청교도나 웨슬리파 운동보다도 더 철저한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꾀한 것이었다. 청교도인이나 웨슬리파가 했던 것과는 달리, 이 새로운 운동은 다만 기존 교회를 정화하거나 부흥시키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사도시대 교회 재건을 추구했다. 사도적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주된 방식들은 성경에 집중함, 성경적인 생활방식, 성경적인 신학, 성경적인 교회론의 채택에 있었다”(J. Gordon Melton, 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 5판, 1996. Gale Research Inc. p. 107).
위트니스 리는 그의 얼마간의 형제회 생활시 존 넬슨 다비와 형제회에 속한 뛰어난 성경교사들을 통해 주님이 밝혀주신 진리의 풍성을 물려 받았다. 그 후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의 오랜 기간의 친밀한 동역을 통해 워치만 니를 통해 주님이 밝히신 성경 진리의 빛을 전수받았다. 워치만 니는 그 당시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술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에서 발간된 영적 서적 3천권 이상을 독파함으로 교회 역사상 밝혀지거나 논란이 되었던 진리와 실행에 정통해 있었다.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유산 아래서 70년간의 성경 연구를 통해 이 빛을 더 풍성케 했다.
(2) ‘이단’이라는 호칭에 대하여
이단을 판정한다는 사람 또는 단체마다 이단에 대한 정의가 가지각색이다. 다시 말하면, 이단판정의 기준 자체가 일률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전에도 우리측이 언급했었지만 구교와 개신교의 경우를 다시 보기로 하자.
천주교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확산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트랜트공의회(1545-1563)에서 루터, 캘빈, 쯔빙글리의 개신교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반대로 개신교의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과 고대 공의회(500년 이전)를 기준으로 천주교를 ‘실제적 이단’으로 정죄했다(교회와신앙 94년 1월호, 108-109쪽).
이것은 이단판정의 기준자체가 지극히 상대적임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천주교의 기준으로 보면 개신교가 이단이고, 개신교의 기준으로 보면 천주교가 이단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을 판정하는 기준은 지극히 단순한 면도 있다. 예를 들면, 까운 입은 목사님이 안 계신다 하면 이단이고, 예배당에 강대상이 없거나 십자가가 없으면 이단이고, 예배시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안 외우면 이단이라는 사람도 보았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가 이단판정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최목사는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그처럼 남발하면서도 무엇이 이단인지를 정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지엽적인 문제나 상대적인 판정기준에 근거하지 않은 ‘성경에 근거한 이단의 정의’를 밝혀주기 바란다.
참고로 밝히자면, 지방교회측이 지난 7월호에 장로교단의 교리와 다른 타 교단의 교리에 관련하여 쓴 ‘이단(Heresy)’이라는 말은 사도행전 24장 5절, 14절의 의미로 쓴 말이다. 즉 여기서 이단이란 말은 유대인이 볼 때 사도 바울은 자신들과 다른 교리를 믿고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즉 장로교단은 자신들만의 교리가 있고 기타 다른 교단들도 나름대로의 다른 교리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만일 최목사의 말대로 개신교파들이 서로 오고가며 예배를 드리고 교역자가 서로 사역지를 옮길 수 있다면, 구태어 ‘장로교회’ 또는 ‘ㅇㅇ교회’ 등 성경에도 없는 교회의 이름을 붙여가면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최목사 자신만 해도 장로교 ‘합동측’에서 신학과 신앙생활을 배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통합측’으로 옮겨가서 목회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합동측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눈에 좋고 바람직한 일로 보일지, 아니면 자기의 이익을 따라 옮겨다니는 기회주의자로 비칠지는 속단할 수 없는 일 아닌가?
II. 최삼경 목사의 신론은 이단적이고 기독론은 비성경적이다
우리측은 반복된 질문을 통해 최목사의 삼위일체관을 밝혀줄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최목사는 자신의 신론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궁색한 변명으로 답변을 지금까지 보류하고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신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나타난 그의 삼위일체관만 보아도 최목사는 충분히 삼신론자이고 그 기독론은 비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측이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하자 최목사는 지난호에서 ‘자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4회에 걸쳐 그토록 담대하게 위트니스 리를 신인합일주의자 또는 양태론자라고 정죄한 글은 누구의 사상을 빌어 온 것인가? 부디 최목사의 이런 말이 토론에서 불리해질 경우 빠져나갈 길을 염두에 둔 변명이 아니기를 바란다.
최목사의 또 다른 변명은, 위트니스 리의 관점이 양태론인가 아닌가 하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최목사 자신이 삼신론자라는 것은 감추고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인지 아닌지만을 밝히자는 최목사의 말은 형평성을 잃은 요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토론과정에서 최목사의 삼신론적인 관점이 여기저기에서 ‘보자기를 뚫고 나오는 밤가시처럼’ 삐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왜 최목사가 삼신론자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겠다.
1. 최삼경 목사는 ‘세 영들’이라는 말을 분리의 의미(세 인격들, 세 하나님들)로 반복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삼신론자이다
먼저 최삼경 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위트니스 리는 비록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셋’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영을 말할 때는 ‘한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아버지 하나님도 한 영이시요, 성령님도 한 영이신데 어떻게 이 둘이 하나라고 하는가?”(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36쪽),
이 말은 삼위일체 안에 두 본질(아버지 하나님이 한 본질, 성령 하나님은 또 다른 본질)이 있다는 말인데 이런 믿음은 정통신앙에 위배되는 명백한 삼신론적 관점이다.
“필자가 본지 96년 12월호에서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을 양태론적이라고 한 이유는 세가지다. 첫째는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라고 했다는 점이요…”(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위 말은 최삼경 목사는 하나님을 ‘세 영들’로 본다는 말이다. 최목사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해 보자.
“필자가 각각 한 영이라고 한 말은 셋에 속한 부분으로서 한 말이다. 즉 아버지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서 영이시요, 아들 하나님도 한 인격으로서 영이시요(물론 아들 하나님만은 육을 취하셨지만), 성령님도 한 인격으로서 영이시다는 말이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이제는 최삼경 목사가 반복해서 주장하는 ‘세 영들’이란 말이 왜 문제가 되는지 보자.
(1) 최삼경 목사는 ‘세 영들’이라는 용어를 ‘분리된 세 인격들’ 즉 세 하나님들의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이 점은 최목사가 삼일 하나님의 상호내재(coinherence)를 부인하는 사실을 함께 놓고 보면 더욱 명백해진다).
우선 ‘용어’의 사용에 대해 비판해 보자.
최삼경 목사가 문제를 제기한 용어들인 ‘인격’이니 ‘격위’니 또는 ‘페르소나’니 하는 말들은 성경 용어가 아니다. 그것들은 신학자들이 편의상 지어낸 말들이다. 그리고, 인격과 위격 또는 격위는 모두 한 단어(헬라어의 페르소나(Persona), 영어의 펄슨(Person)를 번역한 것이다. 양태론으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도 최목사가 지적한 ‘위격’이란 단어가 아닌, ‘프로소폰(얼굴)’ 또는 ‘존재의 양식’이란 단어이다.
이종성 박사는, 페르소나(persona)를 최목사처럼, ‘인격’으로 번역하면 원문의 뜻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했다(삼위일체론, 297쪽). 그런데, 최목사는 ‘인격’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지방교회측을 정통교리에 무지하다고 비난했다. 어느 쪽이 무지한가는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차영배 박사는 최근의 책에서 ‘삼위일체’ 대신 ‘한-세분’이라는 훌륭한 표현을 쓰고 있다(성령론, 1997년, 7쪽). 최목사는 이러한 ‘한-세분’이란 표현이 지금까지 소위 정통교회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차영배 박사도 이단 또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겠는가?
그러나 ‘영’이라는 단어는 상황이 다르다. ‘영’은 성경 용어이며 그 사용법에 엄격한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이 만든 용어인 ‘세 위격(또는 인격)’도 분리의 의미로 쓰면 삼신론이 된다. 즉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세 하나님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영이시다(요 4:24)’고 한 곳은 있어도 최삼경 목사처럼 삼일 하나님을 가리켜 ‘세 영들’이라고 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는 위 인용문들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각각’ 한 영이므로 합해서 결국 세 영이라는 주장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삼신론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러나 같은 장로교 신학자인 칼빈은 결코 최목사처럼 말하지 않았다. 칼빈의 글을 다시 한 번 인용해 보자.
“성부는 성자와 함께 동시에 한 성령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본질적으로 성부 및 성자와 다른 신일 수 없다”(차영배, 개혁교의학, 229쪽).
결론적으로, 최삼경 목사는 ‘세 영들’이라는 말을 분리된 세 본질의 의미로 사용하므로 삼신론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본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요 4:24).
만일 최목사의 변명처럼 ‘세 영들’이 ‘세 인격’의 의미라고 하더라도 다음에 보겠지만 최목사는 이것을 ‘분리의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역시 ‘삼신론’의 이단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같은 장로교 신학자인 캘빈과도 다른 ‘이단교리’를 갖고 있다.
(2) 최삼경 목사는 삼위일체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면서 ‘세 영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최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예를 들어보자.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 속에서도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있다면 그래서 한 인격의 하나님이라면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164-165쪽).
위 말은 무슨 뜻인가?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는 계시지만 지상에 계신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시다는 말이다. 또는 인격이신 아버지는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본질로만 아들과 함께 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아버지는 보내시는 분으로서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보내심 받은 아들만 아버지와 떨어져 땅으로 왔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점이 최목사가 삼신론자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성경적 관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영원히 구별되나 분리됨이 없이 서로 안에 계심을 계시한다. 즉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지상 사역시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아들 안에도 함께 계셨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히 구별되시나 분리됨이 없이 상호내재하시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세계 안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능하며, 성경도 이것을 밝히 계시하고 있다. 위 사실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보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6:32-17:1).
위 말씀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하늘에도 계시고 예수님 안에도 계신다. 아버지의 어떤 부분만이 아니고 아버지 전체가 아들 안에 계신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은 여전히 ‘구별’된 상태로 계신다. 이것이 성경의 균형잡힌 계시이다.
성경을 더 인용해 보자.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하).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9-11).
그러나 최삼경 목사는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목사는 ‘한 하나님 속에 두 분 하나님이 들어 있다면 결국 서로 교제하고 대화할 필요가 없다’(교회와신앙, 97년 6월호, 164-165쪽)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최목사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서 땅에 계신 아들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분리되신 두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목사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단 사상이다. 최삼경 목사 같은 삼신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더 보기로 하자.
1) 최목사의 삼신론적 관점에 의하면, 아버지와 믿는이들은 서로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 땅에 오신 적이 없고 믿는이는 하늘에만 계신 아버지께로 뛰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와 예수님과 믿는이들이 서로 안에 있다고 말한다. 성경을 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아버지와 예수님이)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예수님이 오실 때 ‘구별된 상태로 상호내재하시는’ 아버지도 함께 오시는 것이다.
이번에는 교회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을 보기로 하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which is in God the Father, and in the Lord Jesus Christ)”(살전 1:1).
위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한다. 최목사 믿음대로라면 땅에 있는 교회가 주님이나 성령 안에 있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믿음이 아님을 최목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2) 최목사의 삼신론에 의하면,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니 하늘에는 보좌가 나란히 두 개가 있어야 맞다. 그러나 성경은 보좌가 두 개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서로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기로 하자.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계 22:1).
여기서 보좌는 원문에 단수 명사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을 두 분으로 구분했지만 ‘보좌’는 하나만 말했다. 누구의 보좌인가? ‘상호내재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보좌인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린양은 등으로 계신다(계 21:23; 요일 1:5). 최삼경 목사의 논리라면 두 분이 또는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시고 보좌도 둘 또는 셋이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오직 세 위격의 상호내재를 부인하는 삼신론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이단 사상인 것이다.
2. 최삼경 목사의 기독론은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97년 7월호에서 부활 후 예수님의 인성에 어떠한 역사가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앤드류 머레이’의 기독론을 소개한 바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네널란드의 ‘the Academy of Utrecht’에서 신학을 배운 화란 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 소속 목사요 신학자이다. 대체로 그는 정통신앙을 가진 신학자로 평가되며 그의 책이 한국에도 다수 소개되어 무리없이 읽혀지고 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그의 책에서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을 명쾌하게 해석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이 영광스럽게 된 것이며, ‘성령’이란 신인(하나님-사람)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마지막 아담’ (육신 입은 예수님)은 부활 후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는 말씀(고전 15:45하)과 일치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것은 ‘생명 주는 영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앤드류 머레이가 ‘인성이 영광스럽게 되었다’고 한 말이 최목사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인성에 본질상의 변화가 있어서 제3의 어떤 것이 되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신 후에 ‘영광의 몸의 형체’(빌 3:21), 또는 ‘신령한 몸’(고전 15:44)이 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여전히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지만 기이하게도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는 분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롬 8:34), 동시에 그 분의 몸을 이룬 지체들 안에도 살아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롬 8:10; 갈 2:20).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리자(성령)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우리 안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믿는 이들 안에 계시는 근거를 ‘서신서’의 도처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만큼 보편적인 진리인 것이다. 최삼경 목사는 이러한 지극히 성경적인 기독론을 ‘역사적 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이단적 삼위일체 교리’라고 정죄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극히 성경적인 기독론을 거부하는 최삼경 목사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최삼경 목사는 예수님은 ‘신성, 인성’을 입고 부활하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고, 보혜사 성령님 (제3격 하나님)만 분리되어 이 땅에 오셔서 믿는이에게 체험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1) 최삼경 목사는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아니고 아들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고 말했었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그러므로 육신 입은 예수님은 부활 승천 후 하늘에 남아 계시고 성령 하나님만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실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성령님(하나님)을 영접해도 여전히 아들이신 예수님(하나님-사람)은 영접치 못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될 때, 최목사 자신 안에는 ‘아들’이 없으니 최목사는 영생도 없는 자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이 그 아들 안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요일 5:11-12). 또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했다(고후 13:5). 이 말씀에 의하면 최목사 안에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니 최목사는 하나님의 눈 앞에 ‘버리운 자’가 되고 만다.
(2) 최목사는 성령님을 영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제삼격 하나님) 안에 인성이 있다고 할 수 없으니 그러한 예수님은 ‘인성’은 벗어버린 예수님이 되고 만다. 즉 최삼경 목사는 보좌에 계신 예수님(하나님-사람)과 다른 예수님(하나님)을 영접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최목사가 위 둘 중 어느 것을 주장해도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참으로 이단적인 기독론이 된다. 최삼경 목사가 이러한 사이비 이단적 기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방교회측의 수차에 걸친 요구에도 불구하고 최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3. 최삼경 목사가 삼신론자이므로 위트니스 리의 삼위일체관이 양태론처럼 보이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위트니스 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 항상 셋의 방면을 하나의 방면과 함께 말하고 있으며,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과 상호내재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균형잡힌 삼위일체관이다.
문제는 최삼경 목사에게 있다. 우선 최목사는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양태론’이 무엇인지 정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최삼경 목사가 과연 양태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나 하면서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자’라고 정죄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영배 교수는 어떤 형태의 양태론이든지 ‘격위 사이의 영원한 구별’을 무시하는 것이 양태론자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양태론도 성부고난설, 성부속성설, 범신론적 계승설, 이원론적 가족설, 신지학적 양태설, 범신론적 과정설, 계시 양태설 등 다양하나 모두 격위 사이의 영원한 구별을 무시한다”(삼위일체론, 총신대학출판부, 1986, 74쪽).
위와 같은 기준으로 볼 때,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믿는 위트니스 리는 결코 양태론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전반적인 사상은 충분히 연구하지도 않은 채, 말꼬리 잡는 식의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즉, 최삼경 목사는 자신도 모르는 ‘양태론’을 통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판해 보자.
(1)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말씀을 해석한 것을 양태론으로 정죄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는 말에서,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변증해 보자.
우선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단수로 쓰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가를 보자. 성경에서 세례를 실제로 실행한 사례를 보면, 성도들은 ‘주 예수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준 것을 볼 수 있다(행 19:5; 갈 3:27; 롬 6:3). 그러므로 마태복음 28장 19절의 이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 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시고(마 1:18, 20), ‘아버지’가 그 안에 계시며(요 14:10-11; 마 1:23),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 바된 ‘아들’이시다(갈 4:4; 요 1:18). 또한 처녀에게서 나신 ‘참 사람’이시다(마 1:23, 21). 그렇다면 예수님이 분리된 네 인격(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그리고 사람)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하나님-사람이시다(골 2:9).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말한 것이다(위트니스 리, 진리의 변호와 확증, 1996, 한국복음서원, 96-97쪽).
그런데 최삼경 목사는 이것을 양태론이라고 정죄했다. 이는 최삼경 목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분리된 하나님으로 믿는 ‘삼신론자’이거나,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조화된 한 인격이심을 부인하는 ‘네스토리안 이단’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정죄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과 온전한 사람이 비밀한 방식으로 조화되신 ‘한 인격’이시다.
(2) 위트니스 리가 예로 든 ‘수박비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모두 사람 안에 들어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비유이다.
글이라는 것은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글은 일부만 본문에서 떼어놓고 보면 저자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어린양이시다’는 말을 성경에서 읽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네 발과 꼬리가 있는 양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대신 그러한 표현에서 어린양이 주는 ‘구속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책 중에서 일부를 떼어내어 위트니스 리가 예수님을 ‘수박즙’이라고 한다면서 ‘망령된 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러한 말꼬리를 잡거나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태도는 정직한 것이 아님을 최목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는 어떤 의도로 ‘수박비유’를 사용했는지 보기로 하자.
첫째,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 비유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누차 지방교회측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 속에 들어오시는 ‘경륜적인 면’의 비유이지, 하나님의 본질이 ‘수박’이라는 말이 아니다. 최목사는 이 말을 잘 연구해 보기 바란다.
둘째, 위트니스 리는 본문에서 ‘수박비유’에 곧이어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이 육신되신 것’과 ‘육신되신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한 말’을 설명하고 있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55쪽). 이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부활 후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성령’이 다만 분리된 제3격만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나 분리됨이 없이 함께하시는 완전한 하나님’(성령)으로서 제자들에게 들어오신다는 것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지극히 정통적이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이다. 그리고 ‘수박비유’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은 분리된 채로 하늘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1/3하나님)만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을 없애 주는 데 가장 합당한 비유인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최목사의 믿음처럼 결코 분리된 하나님이 아니시다. 여전히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되시지만 서로 안에 거하심으로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64-165 쪽).
III. 인간론에 대한 반박
최삼경 목사는 지난 8월호에서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을 장황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그 비판의 핵심과 통합측의 77차 보고서에서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최삼경 목사가 자신의 가정 아래 논리를 전개한 부분과, 소위 위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최목사가 주장하는 사람들에 관한 부분은 무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최목사의 가정과 전제는 위트니스 리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최목사가 소위 위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 토론에 있어서 제 삼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최목사는 자신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제 삼자들의 주장을 왜 위트니스 리와의 토론에서 장황하게 거론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없어 할 말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장황한 말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도 어쨌든지 이단이다’ 라는 인상을 남기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어느 경우든 성실한 토론자가 할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제 삼자의 글을 연구하고 인용할 시간이나 지면이 있다면 우리측이 최목사에게 수차에 걸쳐 제기한 질문들에 답변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유익한 일이 아닌가?
1. 최삼경 목사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또한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부인했다
최삼경 목사가 지난 8월호에서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에 이단성이 있다고 한 근거와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목사가 위트니스 리의 인간관을 비판한 그의 글의 소제목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즉 ‘위트니스 리는 혼만이 인격일 뿐,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다. 최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위트니스 리의 믿음이 김기동씨 이명범씨 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비판해 보자.
(1) 위트니스 리가 ‘혼만이 인격’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최삼경 목사가 위트니스 리가 이렇게 말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의 책을 더 연구해서 위트니스 리가 ‘혼만이 인격이다’ 라고 한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여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이 논쟁은 위트니스 리와의 논쟁인 것이다. 최목사의 ‘비판 내용’에 대해서도 반박할 부분이 많지만 근거를 제시하면 그 때 반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 위트니스 리가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점도 길게 반박할 필요를 못 느낀다. 왜냐하면 최삼경 목사 스스로 자기가 한 말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최목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혼이 인격이라면 영은 인격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가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한 곳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단지 혼이 인격이라고 하고 있고 영은 인격이라고 말한 일이 없을 뿐이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최목사는 제목에서는 ‘위트니스 리가 영이 인격이 아니라고 했다’고 하더니, 뒤이어 ‘위트니스 리가 영은 인격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한 곳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개인 생각을 나열하며 무려 6쪽에 걸쳐 장황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이러한 토론 상대방과 ‘진리토론’을 하고 있는 점에 대해 주님 앞에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2. 위트니스 리는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더 상세히 가르친다
최삼경 목사가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을 비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최목사의 논리는 위트니스 리가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하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제한하니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최목사는 이러한 자기 말을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노라고 또 스스로 뒤집고 있다.
“물론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가 인간의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최목사의 고리처럼 연결된 논리는 시작부터 근거없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즉, 최목사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가 인간의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고 시인했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는 ‘전인적인 타락’을 주장하고 있음을 최목사 스스로 인정했으니 더 이상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식이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 모순에 빠진 최목사의 논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목사가 제 삼자의 말까지 동원하여 장황한 말을 한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학적인 틀에 위트니스 리를 어떻게든지 집어넣어 위트니스 리가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한다는 결론을 끌어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 점은 최삼경 목사가 위트니스 리의 인간론에 대해 비판한 통합측 77차 총회 보고서 내용이 잘 증명하고 있다. 즉 “인간의 타락은 전인적인 것인데 비해 (위트니스 리는) 그것을 육체적인 것으로만 봄으로 몸만 타락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범죄하는 영은 죽을지라’(겔 18:20)는 성경 말씀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독자들은 최목사가 작성한 77차 총회 보고서에도 스스로 모순에 빠진 최목사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짓내용을 담아 유포하는 이러한 보고서는 작성되고 발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최삼경 목사의 주장에 헛점이 많지만, 최목사가 ‘인간론’에 있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위트니스 리가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가 참으로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했다면 최목사가 옳은 것이고, 부인하지 않았다면 최삼경 목사는 거짓말로 남을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트니스 리는 사람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르치지도 않고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위트니스 리의 말을 차례로 인용해 보자.
“사람의 피조된 영은 원래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관이었다. 사람은 그의 영을 통하여 그의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했다. 후에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영은 죄의 오염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그리하여 사람의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고 죽은 영이 되었다. 영이 죽었음으로 낡았다.
우리가 거듭날 때 주 예수의 피가 우리 영이 입었던 오염을 깨끗케 하므로, 그 때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요소인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주입하고 우리의 영을 소생시킨다(골 2:13).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은 낡은 영이 새롭게 되고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생명의 인식, 1988년, 한국복음서원, 42쪽).
한 군데 더 인용해 보자.
“우리가 사람의 첫 번째 타락의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결과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해할 것이다. a. 혼이 부패됨-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사람의 혼이 부패되고 오염되고 파괴된 것이다. 혼은 마귀의 생각과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염되었다(창 3:7절). b. 몸이 천연적인 몸으로 변함- 그런 다음 몸은 지식나무의 요소, 곧 사탄의 요소를 가진 천연적인 몸으로 변하여 육체가 되었다. …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는 사탄의 죄로 완전히 점유되고 적셔졌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육체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c. 영이 죽음- 타락한 결과 사람의 영은 죽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고립되었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그 기능을 상실했다(8절, 10절).
사람의 세 부분-몸과 혼과 영-은 모두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 몸은 천연적인 몸으로 변했고 혼은 오염되었으며 영은 죽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씻음받았음을 인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지! 또한 우리의 영이 살아났고 혼이 새로움과 변화의 과정 아래 있으며 몸이 영의 지시 아래 있게 될 것임을 인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지!”(위트니스 리, 창세기 강해(보급판)(1), 1993년, 한국복음서원, 257-271쪽).
한 군데만 더 인용해 보자.
“에베소서 2장 1절은 우리가 죄로 죽었었다(who were dead)고 말한다. 이것은(위 구절에서 ‘죽었었다’는 의미는) 우리(타락한 사람)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활동적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혼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우리의 영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위트니스 리, 사람의 영, 1986년, 한국복음서원, 47쪽).
위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죽었었다’는 것이 ‘사람의 영이 죽은 것’이라고 했더니 그 말에 대해서 최삼경 목사는 ‘죽었었다(과거시제)’는 것은 ‘혼과 육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한다는 증거라고 비판했다.
이런 엉터리 성경해석이 어디 있는가? 에베소서는 분명히 그 당시 육신적으로 살아 있었던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위 ’죽었었다’가 분명히 과거시제임을 최목사는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죽었었다’ 라는 말은 타락으로 인해 그들의 영이 죽었었다(영의 기관은 있으나 기능이 죽은)는 것이지 그들의 영과 혼과 육이 다 죽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영과 혼과 몸이 죽은 사람은 무덤에 있어야지 어떻게 사도 바울의 서신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타락의 결과로 영, 혼 ,몸을 가진 사람 전체가 결국엔 죽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동일한 77차 보고서에서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범죄하는 영은 죽을찌라(겔 18:20)’는 성경말씀과도 다르다고 비판했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로 되어 있으나 최목사는 그 단어를 임의로 ‘영’이라고 바꾸었다. 그 목적은 오직 위트니스 리를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에스겔서 18장 20절의 원문을 보면 ‘범죄하는 영(spirit)’이 아니고 ‘범죄하는 혼’(soul, KJV, RSV 참조)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에스겔 18장 4절에도 있는데 거기서도 원문은 ‘범죄하는 영’이 아니고 ‘범죄하는 그 혼(soul)이 죽으리라’고 되어 있다. 미가서 6장 7절에서도 ‘내 혼(My soul)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을 말할 때는 분명히 ‘spirit’라고 구분하여 쓰고 있다(스1:1, KJV 참조).
중요한 총회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성경원문도 안 찾아보고 거짓된 보고서를 작성하여 관계된 사람들을 속이고, 신실한 믿는이들을 주님 앞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위와 같이, 위트니스 리가 ‘사람의 영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범위를 제한하는 이단사상이라고 최삼경 목사가 쓴 총회보고서는, 근거도 없고,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통해 내려진 거짓되고 부당한 결론이었음을 독자들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3.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사단이 죄(Sin, 단수)로서 사람의 육체 안에 들어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타락의 원인인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타락의 결과 사단의 본성인 죄(Sin)가 사람 속에 들어와 조성된 것도 믿는다. 만일 사람의 타락을 말할 때 다만 사람의 불순종만을 말한다면, 그 불순종의 결과 저주와 사망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계시하는 것처럼, 어떻게 ‘죄’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움직이는지, 특히 불신자가 어떻게 ‘사탄의 자녀’가 되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우리는 이런 예화를 들 수 있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독약이 든 병을 만지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이는 병을 내려서 독을 마셨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금지함을 어겼지만 사실상 이것은 작은 일이다. 참으로 심각한 일은 독이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 지식나무를 먹은 날 악한 본질이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만 범법의 문제가 아니라 독 있는 요소, 죄, 즉 악한 자의 본성이 사람의 몸 안에 들어온 문제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 악한 요소가 여전히 우리의 육체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거나 논쟁할 수 없다. 심지어 당신이 이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에도 죄의 악한 본질이 당신의 몸에 거한다”(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위 책 268쪽).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에 의해 지지된다.
(1) 성경은 우리가 다만 ‘죄’를 범한 자일 뿐 아니라 ‘죄로 조성된 자’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9절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다. 여기서 바울은 밖의 ‘죄의 행위’가 아닌, 내적이고 본질적으로 조성된 ‘죄의 본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죄(Sin)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사람)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다(롬 5:12상).
(2)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마귀의 자녀들’을 말한다. 마귀의 자녀가 되는 것은 마귀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며 마귀의 생명과 본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 바리새인들에게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고 하셨다. 요한일서 3장 10절도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라고 했고, 8절에서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라고 말하고 있다.
마귀는 다른 이름이 옛뱀이요 큰용이요 사탄이다(계 12:9).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했다(마 3:7). 주님도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셨다. 심지어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상)고 하셨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다만 죄인일 뿐 아니라 사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사탄의 자녀임을 말하고 있다.
(3) 사탄은 죄(Sin)로서 사람의 육체 안에 거한다
원래 사람의 몸은 순수하고 좋게 창조되었다(창 1:31). 그러나 우리가 타락했을 때 사탄의 악한 본성인 죄가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을 육체로 변질시킨 것이다.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상)’ 라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20하)고 했다. 이것은 ‘죄’가 육체 안에 거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Sin)는 육체 안에 거하고(롬 7:20절), 왕노릇하고(6:12), 주관하고(6:14), 살아나고(7:9), 기회를 얻어 속이고 죽인다(7:11). 이러한 것은 다 ‘죄’의 인격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위트니스 리만의 해석이 아니다. William Sanday & Arthur C. Headlam도 이러한 구절들을 사단의 악한 본성이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해석했다(A Criti cal &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5thed, Edinburgh:T&T Clark, 1958, pp.145-146). Hermann Olshausen도 사탄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람 밖의 객관적인 인격)이며 동시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타락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과 사탄 자신이 함께 결합된 주관적인 총체)(엡 2:2)라고 했다(Bibl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5, New York : Shedlon, Blakeman &Co., 1858 p.58).
H.A.W. Meyer도 그의 ‘에베소서 주해 핸드북’에서 에베소서 2장 2절을 해석하면서, ‘타락한 사람은 그 안에 사탄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New York : Funk & Wagnalls Pub., 1884, pp. 361-362).
캘빈도 로마서 7장 14절- 25절에서 바울이 묘사한 투쟁은 성령 받은 자에게서만 발견된다고 했다(박형룡, 구원론, 1988, 366쪽).
사단은 한편으로 공중 권세잡은 자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 죄(Sin, 사단의 본성)로서 사람 안에 들어와 ‘죄와 사망의 법’으로서 역사한다. 이러한 진리는 성경과 신실한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빛은 우리로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신 주님을 신뢰케 한다.
4. ‘위트니스 리가 생명나무가 하나님이요 선악과는 사단이라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비판에 대하여
반박하기에 앞서 그렇다면 최삼경 목사는 ‘생명나무’와 ‘선악 지식의 나무’를 무엇으로 보는지 다음 호에 답변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먹기를 원하셨던 것이고(창 2:9), 먹으면 영생하는 것이다(창 3:22). 또한 이것은 지나간 역사 기록이 아니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계 2:9, 22:2, 14, 19). 요한복음 6장은 주님만이 참된 음식이요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하고 있다(요 6:27, 32-58). 누가 영생을 줄 수 있는가? 주님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분이 생명나무이시다(요 1:4, 15:5).
상징적으로 볼 때,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고, ‘선악과 나무’는 사망의 근원(히 2:14)인 사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유명한 성경 주석가들인 Jamieson, Faussett, and Brown : Keil and Delitzsch; Patrick Fairbairn도 동의한다. Patrick Fairbairn은 선악과는 그 자체 안에 사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The Typology of Scripture vol 1, Zondervan Publishing House, n.d, p.209).
5. ‘주의 이름 부름’을 비난함에 관하여
최삼경 목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방)교회 성도들의 ‘주님의 이름 부르는 실행’을 못마땅한 듯이 비난하며, 주문처럼 부른다고 조롱했다. 이것은 사울(바울)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의 부요함을 체험하는 믿는이들이 있는가 하면(롬 10:12),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것을 비난하고 핍박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을 성경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을 직접 인용해 보자.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좆는 사람을 만나면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13-14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1절).
위 말씀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교회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근거를 다른 곳에서 더 보기로 하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고린도 교인들과 각처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향해 썼다. 믿는 이들을 나타내는 특징이 여러 가지 있을텐데도 성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초대교회 때 주의 이름 부르는 실행이 보편적인 실행이었다는 강한 증거가 아닌가?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핍박했던 바울이 후반에 가서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좆으라”(딤후 2:22).
주의 이름은 예수(JESUS)이시다(마 1:21). 또한 ‘부르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외치다’ ‘부르짖다’의 뜻을, 헬라어는 ‘사람을 불러 일으키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는 뜻을 함축한다.
지면의 제한상,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한 성경의 사례를 더 알기 원하는 독자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자’ 라는 소책자(위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1984)를 참고할 것을 권한다.
최삼경 목사의 비아냥처럼, 그 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는’ 지방교인은 없다. 그대신 필자를 포함해서 이러한 실행을 통해 사신 인격이신 주 예수님의 부요함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IV. 교회론에 대한 반박
최삼경 목사는 96년 12월호 그의 글 서두에서 위트니스 리가 소위 ‘정통교회’의 예배도 부정하고, 침례(세례)의 의미도 부정하며, 목사도 부정하고, 장로의 개념도 다르며, 심지어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최목사의 표현은 기독교내 목회자와 성도들로 하여금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인들을 향해 적개심 또는 심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동처럼 들린다.
위트니스 리는 최삼경 목사가 묘사하듯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난이 두려워 진리를 왜곡시키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론’에 관해서라면 누구 못지 않게 위트니스 리나 필자들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지면의 한계상, 우리는 제한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앞에서 다른 믿는이들에 대해 비난이 아니라 진리를 밝히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반박하고자 한다.
1. 정통교회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저주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교회와신앙> 97년 3월호에서 충분히 말했다. 독자들은 위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 가지 재차 강조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는 ‘교회조직(교파)(System)’과 ‘교회 성도들(Person)’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후자는 성경에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둘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런지를 보기로 하자.
오순절 날 성령이 부어지므로 이 땅 위에 교회가 생겨났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에클레시아, 부르심 받아 나온 무리인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살고 있는) 교회’(the church which was at Jerusalem)(행 8:1)라고 불리웠다. 빌립보에 살고 있으면서 예루살렘 교회라고 불리운 것이 아니다. 살고 있는 그 지방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해 흩어져 세운 교회인 안디옥 교회(원문은 the church that was at Antioch임)를 말하는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도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우주 가운데 하나 뿐이다(엡 1:23, 4:4). 왜냐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개의 몸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몸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으므로, 살고 있는 지방의 한계를 따라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이러한 사례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 즉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롬 1:7), 고린도 전후서는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고전 1:2),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사는 성도들에게(엡 1:1),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사는 성도들에게(빌 1:1),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사는 성도들에게(골 1:2) 보낸 편지이다.
이러한 지방의 한계 외에 ‘어떤 사람’이나 ‘밝혀진 진리’를 기준으로 ‘00 교회’라고 부른 사례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을 ‘분쟁’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으로 보았다(고전 1:11-13).
그러나 요즘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 어떠한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것은 다 성경 말씀(원칙)에 뭔가가 더해진 결과가 아닌가?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더해진 부분을 그것도 계시록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지적했던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기독교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교파의) 조직체가 그리스도에 속하지 아니했고 또 그(조직)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도 알았다. 물론 그들 중에도 구원받은 신도들이 일부 있으며 이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교파조직 속에는 그리스도가 안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그들 조직체 안에 아무런 지위도 차지하고 있지를 못한 것이다. … 혹자는 묻기를 그러면 분열된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신도나 주님을 충심으로 사랑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없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있다고 인정한다. … 환언하면 교파(조직)은 부인하되 그 교파에 속해 있는 성도들은 인정하며 … 어느 교파 중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우리들의 형제됨을 인정한다”(위트니스 리, 성경에 나타난 교회, 1986, 한국복음서원, 17, 50, 99, 103쪽).
위와 같은 위트니스 리의 관점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균형잡힌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지방교회측이 자세히 밝힌 바 있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35쪽). 즉, 위트니스 리는 ‘교파의 조직’은 거부하되, 교파 안에 있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몸된 지체와 형제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교파안의 성도들을 저주하고 욕했다고 말했다. 이 어떠한 거짓말인가!
2. 최삼경 목사가 말하는 소위 ‘정통교회’의 목사와 장로의 개념은 무엇이며, 그것들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가 기성교회의 목사를 부정한다는 최삼경 목사의 말은 우선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들을 때 기분 좋은 말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을 최목사가 노리고 있는 줄은 안다. 그러나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최삼경 목사가 먼저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교회 인도 직분에 대한 지방교회측의 입장을 밝힌 다음, 기성교회의 목사 제도를 비판하겠다.
(1) 지방교회에는 목사가 있는가?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지방교회에는 목사가 없다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이 말은 한 면으로는 맞고 한 면으로는 틀린다.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목사가 없다. 그러나 ‘영적 아비’로서 교회를 감독하고, 지체들을 목양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양무리의 본이 되고, 이리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많다.
빌립보서 1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함으로 한 지방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감독들(장로들)과 집사들을 포함하는 모든 성도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의할 것은 원문에서 “to all the saints... at Philippi with the bishops and deacons.”라고 했다는 점이다. 이 구절에 사용된 접속사가 ‘and’가 아니고 ‘with’인 것은 집사나 장로도 같은 성도임을 보여준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등의 직분이 없는 사람만 ‘성도님’이 아니고, 집사도 장로(개신교 안의 목사를 포함한)도 ‘성도’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장로들(행 14:23; 딛 1:5)과 집사들(딤전 3:8-13)을 부인하지 않는다.
(2) ‘기성교회’ 내의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교회직분’은 성경적이 아니다
사실 목회자의 긍정적인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이견이 없다고 본다.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의 부정적인 상태까지도 정당화하려는 데 있다. 지방교회를 포함하여 ‘참된 주의 일꾼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계급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회직분이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우선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기성교회에 편만한 성직자, 평신도 개념이 신약의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을 보기로 하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상).
위 말씀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을 우리는 현대식으로 표현하여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인가?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의 소유된 모든 백성’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모든 선민들(고전 6:20; 행 20:28)이 왕같은 제사장(성직자)들이다.
에베소서 4장 11-12절도,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들이 하는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원문은 ‘사역’임)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들의 일이 세 가지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한 가지 일에 모아진다. 그런데 바로 다음 16절에서는,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소위 ‘은사있는 자들’의 하는 일과 ‘지체들’이 하는 일이 똑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임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전하여 주님의 양(믿는이들)이 되게 하고, 그러한 양들에게 계속 생명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는 동일한 일을한다. 이 일이 ‘성직(거룩한 직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새 언약(신약)의 일꾼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영으로 분배(공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고후 3:6; 요 6:63). 즉 부활 후 주님이 믿는이들 안에 들어오셔서 성도들을 통해 자신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고 계신 것이다.
기성교회측은 ‘목사’의 근거를 위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목사(혹은 목자)와 교사’를 합친 것에서 찾는 것 같다(박형룡, 교회론, 1988, 138-139쪽). 그렇다면 자격이나 조건을 따지기 전에 묵묵히 그러나 실질적으로 ‘목양’과 ‘가르침’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눈 앞에서 성경 원문에 근거한 ‘목사’가 아닌가?
‘목사’라고 불리우지는 않지만 C.C.C.나 ‘네비게이토’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 안에서, 그리고 지방교회들 안에서 이러한 목양과 가르침에 자신을 헌신한 귀한 ‘성도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한 최 목사의 의견은 어떤가? 아울러 정규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정식 목사’가 된다는 성경근거를 다음호에서 밝혀 주기 바란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오해가 없기 바란다.
최삼경 목사에게 하나 더 질문하고자 한다. 기성교회에서는 ‘목사’도 원칙적으로는 ‘장로’의 한 부류라고 했다(통합측 헌법 제24조 3항, 박형룡, 교회론, 137쪽). 그렇다면 같은 장로이면서 목사는 ‘성직자’가 되고 ‘진짜 장로’는 ‘평신도’가 되는 성경근거는 무엇인가? 기성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최삼경 목사가 더 잘 알 것으로 본다.
끝으로, 최삼경 목사는 기성교회의 ‘목사제도’에 계급적 또는 권위적인 요소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교회와 신앙측>에 실린 한 목사님의 말을 인용함으로 그에 답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발생되는 많은 사건과 문제는 90%가 목사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눈을 뜨고 찾아봐도 참 지도자를 만나보기가 힘들고, 철저한 이기주의 아니면 이기 집단들만이 눈에 쉽게 들어오고 있다. … 교회의 체질은 대부분이 목회자에 따라서 결정되어 지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체질은 제사장적인 목회자들이 율법 중심의 목회를 함으로 교인들은 목사에게 맹종하는 것으로 잘 길들여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를 오히려 불편한 관계로 만들고 말았다. 권위주의 때문이다”(교회와신앙, 96년 6월호, 44, 48쪽, 새교회운동협의회 대표 목사 이평소).
3. 최삼경 목사가 말하는 ‘정통교회’의 예배는 무엇이며 그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 기성교회들 안에서 그대로 실행되고 있는가?
최삼경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소위 ‘정통교회’의 예배도 부정한다고 정죄했다. 최목사는 다음호의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어느 책, 몇 쪽에서, 어떻게 ‘정통교회’의 예배를 부정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기 바란다. 아울러 위트니스 리가 침례의 의미를 부정했다는 근거도 제시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번호에서 ‘예배’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관점을 간략히 소개하고 소위 ‘정통교회’의 예배를 비판한 ‘기성교회’ 목사님의 글을 소개하는 선에서 교회론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근거도 없는 최삼경 목사의 말을 길게 반박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1) 위트니스 리의 예배관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예배’를 언급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요한복음 4장이다. 말씀을 직접 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위트니스 리는 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영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도록 그녀의 영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에 관해 그녀를 일깨워 주려는 것이었다. 그녀의 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은 생수를 마시는 것이요, 생수를 마시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이다. 예표론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1) 하나님이 그분의 처소를 세우시려고 택한 장소이어야 하며(신 12:5, 11, 13-14, 18) (2) 제물이 있어야 한다(레 1장-6장). … 택한 장소는 ‘사람의 영’을 예표한다. …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그러므로 그녀가 특정한 장소 대신 그녀의 영 안에서, 제물들 대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 하나님을 접촉해야 함을 의미한다”(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강해(1), 한국복음서원, 1994, 155-156쪽).
즉 위트니스 리의 예배관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배하는 사람은 영 안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졸거나 딴 생각을 하지 않고, 경건하게 예배시간에 앉아 있다고 해도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말한 예배는 아닌 것이다. ‘예배’라는 단어의 원문의 의미가 ‘가까이 가서 입맞추다’ 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 최삼경 목사가 말하는 ‘정통교회’의 예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가?
우리는 위 질문에 대한 최목사의 답변을 기다리겠다. 우선 한 개신교 목회자가 평가한 ‘정통교회의 예배 현실’을 인용해 보자.
“왜 한국 교회에 예배의 갱신이 필요하고 예배가 갱신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 내의 예배 신학의 부재, 예배 개념에 대한 혼란, 예배 형식들의 무질서, 샤머니즘적 요소의 침투 등이 시급한 예배의 개혁을 요청하고 있다고 하겠다. … 예배는 성만찬을 곁들이거나 적어도 성만찬을 전제로 하는 주일 낮의 공중 예배를 말하는 것이며, 나머지 형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집회와 같은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말씀과 성찬’임을 생각할 때 … 적어도 한국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라도 성만찬 예전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교회와신앙, 95년 7월호, 47-49쪽, 이현웅: 목원교회 목사이며 서울 장신 예배학 강사).
결론적으로, 본 토론의 목적은 단순한 말싸움 또는 특정인을 정죄함에 있지 않고,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참된 빛을 발견하는 데 있다고 본다. 최삼경 목사도 이 점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남은 토론을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상호간 겸손한 마음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기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벧전 5:5하).
Daniel Towle/ 캘리포니아 플러톤교회 목회자
조동욱/ 캘리포니아 플러톤교회 목회자
출처 : 믿음을 위한 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