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9) - 워치만 니 아내의 반응과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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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9)
- 워치만 니 아내의 반응과 근황
글쓴이 코람데오
1956년 1월 29일에 상하이 교회의 대부분의 인도자들이 중국 공안국에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종교국이 주최하는, 워치만 니의 죄상을 고발하는 군중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그들은 죄목에 워치만 니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포함시켰습니다. 릴리 슈의 책에 따르면(115쪽), 이때 누군가가 워치만 니의 아내에게 느낌을 물었고, 그의 아내는 “하늘에서 더 높은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She answered briefly: There will be higher judgment in heaven”). 이 말만 들으면, 마치 워치만 니의 아내도 남편의 부도덕한 일을 인정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 릴리 슈는 중국어판에 있던 ‘그 후 이 말이 성도들 사이에 퍼졌다’는 문장을 영문판에서는 삭제하여, 마치 본인이 위 대화를 직접 목격한 듯한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수천 명이 운집한 상태에서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워치만 니 아내가 한 위의 말은, “최종 심판은 (지금 이 사람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하늘에서 있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릴리 슈가 교묘하게 편집한 것처럼, 워치만 니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아내가 보기에) 하늘에서도 벌을 내릴 것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참고로 이 때는 중국 정부가 치밀하게 짜인 각본(저의 첫 글 참조)에 따라 워치만 니를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그런 군중 대회들이 신문 지상을 통해 중국 전역에 중계되던 때였습니다. 릴리 슈는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섬으로써 어린 나이의 대학생임에도 중국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한 편, 1952년에 중국 공안들에 의해 끌려가 생사도 모르고 있다가 4년 만에 수 천명의 군중 앞에서 온갖 흉악한 죄명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 남편을 보아야 하는 아내의 심정은,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사건 이후에도 아내인 Zhang Pinhui(체리티 장)의 남편인 워치만 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주님을 향한 그녀의 신앙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이 점은 릴리 슈나 유동근 목사가 입장을 바꾸어 놓고 깊이 새겨 볼 대목입니다.
아래 내용은 워치만 니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인 장핀후이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장 자매의 여동생의 손녀인 완 샤오링이 증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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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완 샤오링은 워치만 니 처제의 손녀이며, 워치만 니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워치만 니의 아내이자 자신의 둘째 이모 할머니인 장핀후이(Zhang Pinhu, 체리티 장)의 주요 간병인이었음. 그녀는 중국어 원문에서 워치만 니를 "시아버지"로, 장핀후이를 "시어머니"라고 불렀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글 번역에서는각각 ‘이모부 할아버지’와 ‘이모할머니’로 호칭함).
완 샤오링의 증언- "워치만 니와 그의 아내의 마지막 두세 가지 사건을 기억하며"
(1973년 4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히 11:38).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주목합시다. 그분은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이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겉옷을 어린양의 피로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계 7:14).
1966년에 시작된 문화 대혁명은 중국 대륙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용광로의 불이었다. 나의 이모할머니인 니 자매님은 젊었을 때 옌창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고, 평생토록 니 형제님의 현숙한 내조자가 되었다. 이모부 할아버지(니 형제님)께서 투옥된 후 이모할머니도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고 출옥한 후에도 여전히 감시를 받았다. 문화 대혁명 당시 이모부 할아버지로 인해 그녀는 '반혁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비인간적인 고문을 많이 당했다. 이모할머니는 몸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아주 심한 고혈압과,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하며,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과 같이 잠잠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1966년 여름 어느 날 그녀는 한 무리의 홍의병들에 의해 한 작은 방으로 끌려 들어가 밤낮으로 온갖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밖에 있던 우리는 욕설과 협박 소리가 뒤섞인, 가죽띠로 몸을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을 치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모할머니가 입을 열어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듣지 못했다. 얼마 후 이모할머니는 풀려났는데 그녀의 눈은 초록색 찐빵처럼 부어 있었고 몸의 여러 곳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여러 개의 안경이 깨졌고, 인간의 기본적인 인격마저도 무시당했다. 여러 차례 그녀는 사람들에게 희롱당하며 길가로 끌려 다녔다. 한 번은 다른 두 노자매들과 함께 강제로 높이 들게 한 손에 신발이 신겨졌고, 머리에는 종이로 만든 뾰족모자를 쓰고, 가슴에는 명패를 달고 사람들에게 욕설과 능욕을 들으며 장시간 가만히 서 있는 벌을 받았다.
그 목적은 그녀들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 그 세 자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홍의병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각각에게 '너희는 그래도 너희 예수를 믿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믿는다'라고 했다. 홍의병들은 그들에게 화를 내며 땅에 있는 구두짝을 들어 그들의 몸과 머리에 던지면서, “그래 너희의 화강석 같은 머리로 너희 하나님을 만나 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모든 환난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고 견고히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핍박을 말할 때 기쁨이 충만하여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당하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홍의병들은 집구석구석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모두 찾아내어 가져갔다. 그러나 이모할머니는 온갖 방법으로 몇 권을 감추어 두었다. 한 번은 어린아이들이 지붕 위에서 놀다가 지붕 밑에 감추어 둔 성경 두 권이 발견되어 심문을 받았다. 주님을 믿은 후 나는 큰 부엌 뒤에서 작은 성경 한 권을 발견하여 기뻐서 어쩔 줄 몰랐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모할머니가 숨겨 놓은 것이었다. 성경이 매우 귀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이 작은 성경은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모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뒷골목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감옥에 있는 죄수보다 더 비참하였고 모욕과 박해를 받았다. 행인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녀를 때리고 침을 뱉을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반혁명분자'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그녀를 비판하는 모임이 있은 후 이모할머니는 나에게, "우리는 세상, 곧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전 4:9). 성경은 벌써부터 나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았다"라고 하셨다. 모든 핍박 중에도 그녀는 인신공격을 받은 자리에서 항상 묵묵히 쉬지 않고 기도했다. 그녀는 시종 주님을 의지하여 굳게 섰고 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날이 거듭되고 해가 거듭되는 동안 그녀를 본 사람들은 “흰머리 노파야!”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모두 은색머리의 노파가 자신과 남편의 신앙을 위해 감시를 당하고 중노동을 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좋은 증인이 되었다.
1970년에 내가 농촌으로 강제노동을 하러 갈 무렵에 (그때 중학교를 졸업하면 다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이 되어야 했다) 이모할머니는 나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1971년 봄 내가 상하이를 떠나기 전 이모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보배로운 구주이시다. 어찌하든지 너는 주님을 굳건히 따라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농촌에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의 놀라운 인도와 크나큰 은혜를 입었는데, 나는 이것이 이모할머니의 중보기도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모부 할아버지(워치만 니)가 1952년에 체포되기 전에 교회 일로 홍콩에 가신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이모부 할아버지에게 본토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본토로 돌아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이 그를 위해 정한 길 - 나의 앞길은 들림것이 아니면 순교하는 길 - 에 대하여 매우 분명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붙잡혀 상하이의 Tilanqiao 감옥에 투옥되었다. 1967년에 그의 15년 형기가 끝났을 때, 정부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했다는 내용에 공개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워치만 니가 신앙을 포기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그에게 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주님은 그에게 너무나 보배로우시다.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그는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감옥에서 15년형을 마치고 나서도 그는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죄수가 되려고 했다. 그때의 공개적인 태도 표명의 거부는 더 큰 핍박을 가져왔다. 이모부 할아버지는 두 명의 악한 범죄자와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니 형제님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니 형제님을 더 심하게 학대할수록 그들은 더 큰 공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옥중에 있는 한 사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모부 할아버지가 입은 솜으로 만든 조끼를 그들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모부 할아버지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표명함으로써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들은 이모부 할아버지의 형기가 차도 자신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비밀리에 니 형제님을 상하이 근교에 있는 칭푸현 칭동 노동 교화소로 이감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이모할머니는 이모부 할아버지를 한 번 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어져 수개월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모부 할어버지가 더 고통스러운 곳인 안후이의 깊은 산속 바이마오링 노동 교화소로 이감되었다는 것이다.
1971년 11월에 이모할머니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 일 전에 이모할머니는 이모부 할아버지와와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한동안은 편지 연락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 이모부 할아버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모할머니는 뇌졸중에 걸린 후 돌아가실 때까지 정확히 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것 또한 세상에 있을 때 그녀가 주님께 구한 바였다. 그녀는 매우 심각한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뇌졸중으로 죽을 것을 알았고, 뇌졸중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빨리 주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이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장시간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모할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갈망을 이루어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드린다. 뇌졸중으로 혼미케 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삼일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모할머니는 매우 평안했으며 아무 고통 없이 주님께 가셨다.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우리는 이모부 할아버지에게 즉시 그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는 이모부 할아버지가 심장이 매우 쇠약하므로 그 소식으로 인한 타격을 감당치 못할까 보류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이모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이모부 할아버지는, 이모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해질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예감이 있으셨는지 편지에서 항상 이모할머니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편지에서 이모부 할아버지는 빨리 감옥에서 나와 이모할머니와 함께 있으면서 병중에 있는 그녀를 수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큰 이모할머니(니 자매님의 맏언니)와 손녀가 1972년 초에 안후이 성으로 이모부 할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그의 심장병이 극히 악화된 것을 알았는데 이모할머니의 별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모부 할아버지와의 왕래가 유일하게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바로 이모할머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후에 같은 감방에 있던 한 동료 수감자의 말에 의하면, 이모부 할아버지는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면 이모할머니와 항상 함께 있기를 갈망하셨다고 한다. 그는 이모할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편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 형기는 내 아내의 생명과 경주를 하는 듯하다. 만일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내가 나갈 수 있다면, 그녀를 잘 섬기겠다. 이는 그녀가 나로 인하여 너무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모 할아버지는 투옥되기 전에 교회 봉사로 전국각지를 바삐 다녔었다. 투옥된 후 순식간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그들 부부가 함께 있었던 날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이모 할아버지가 붙잡힌 후 그들은( 공산 정부) 그를 모함하기 위해 끔찍하고 날조된 많은 혐의를 조작하여 그를 무고히 음해하였다. 당시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들에게 속았다. 그러나 이모할머니는 그를 제일 잘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워치만 니-역자 주)에 관해 그들이 말한 일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婆婆说:“他们说他的这些事,都是根本没有的)”。남편 때문에 그녀는 사람으로서는 받을 수 없는 치욕을 수없이 당했다. Tilanqiao감옥에 갇혔을 때 이모할머니는 매월 한 차례 소량의 음식과 일용품을 이모부 할아버지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청동 농장으로 이감된 후에도 이모할머니는 그를 한 번 만나 보았지만 그 후로는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이모할머니의 별세로 인하여 이모부 할아버지는 매우 괴로워했다. 같은 감옥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그가 여러 날 동안 슬픔에 잠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월 22일에 이모부 할아버지는 큰이모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수 년간의 압박과 핍박도 그를 낙심케 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앙망하는 분은 영원히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1972년 6월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이모부 할아버지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큰 이모할머니와 농장으로 달려 갔을 때 이모부 할아버지는 이미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밖에 볼 수 없었다. 그의 감방 동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의 심장병은 매우 심하게 발작하여 위독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경운기에 실어서 농군들이 쓰는 모자 하나를 씌우고 사십리 밖에 있는 농장병원으로 끌고 갔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조차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동을 가장 피해야 할 심장병환자를 그렇게 데려갔다. 바로 이렇게 외조부님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별세하시게 되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베개 밑에는 아주 떨리는 손으로 쓴 몇 줄의 글을 담은 쪽지가 있었다. 그 말씀은 이러하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죄에서 속량하기 위하여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한 이것은 우주 가운데 최대의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생』 농장 간부가 이 쪽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주님께 이 말씀을 내 마음에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노동 교화소의 간부들은 그가 많은 노트에다 소위 '반혁명 일지'를 썼다고 했다. 이것은 옥중에서 진리에 대해 그가 새롭게 얻은 빛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보존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중요한 원고들은 감옥에서 빼낼 길이 없을 것 같다.
감방 동료 중 한 사람이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는데, 이모부 할아버지가 아직 세상에 있을 때 친구 중 한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이모부 할아버지가 별세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구원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모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피에 젖은 면류관을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짊어지고 주님께로 갔다. 하나님은 비록 살아서 아내와 함께 있고자 했던 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 -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함께 만나는 것 -을 예비하셨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간직한 채 죽었다. 이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히 11:13).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히 11:16).
그들은 많은 순교자들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신 이기는 이들의 무리였고, 이 세상에 있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안식에 들어갔으나 그들의 기도와 열매는 항상 하나님께 받아들여져 끝없는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그들의 발자취는 우리가 더욱 주님께 충성하도록 우리를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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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간증문에서 보듯이, 워치만 니의 아내인 체리티 장 자매님은 주님 품에 갈 때까지 중국 공산 정부가 지어 낸 말들을 믿지 않았고, 변함없이 워치만 니를 사랑했습니다. 워치만 니와 9년 동안 같은 감방에 있었던 우요치 형제는 자신의 간증문(https://www.localchurch.kr/church/298)에서 워치만 니 역시 아내를 변함없이 사랑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워치만 니는 자신에게 ‘그의 아내가 그를 매우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내가 심각한 고혈압(140+/200이 넘는)이라 형기가 빨리 채워지고 나가서 아내를 보살피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어느 날 저는 일에서 돌아왔고, 니 삼촌의 얼굴이 눈물로 가득 찬 것을 보았습니다. 니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니 삼촌은 매우 슬퍼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처럼 서로 죽을 때까지 신뢰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였던 워치만 니와 그의 아내에게, 릴리 슈와 유동근 목사가 지금처럼 중국 공산당이 교묘하게 지어낸 온갖 민망한 말들로 굴레를 씌워서 얻을 이익이 과연 무엇일까요? 안타깝기만 합니다.
원문 출처: https://shanghaichristianassembly.org/?page_id=29
(해외 기독교 선교 중보기도 소식지, Prospers the Gospel of China, 1973년 4월)
万小玲的见证
註:倪师母(张品蕙姊妹)是萬小玲的姨婆,她的祖母與张品蕙是姊妹。萬小玲是张品蕙晚年的主要照顧者。她稱倪柝聲弟兄為「公公」,倪张品蕙姊妹為「婆婆」。
原載:万小玲,《记倪柝声夫妇末后二三事》,《海外基督使团代祷通讯兴旺中华福音》,1973 年 4 月。(https://www.goldenlampstand.org/glb/read.php?GLID=04802)
“本是世界不配有的人。”(希伯来书第十一章18节)
──记倪柝声夫妇末后两三事──
“仰望为我们信心创始成终的耶稣;祂因那摆在前面的喜乐,就轻看羞辱,忍受了十字架的苦难,便坐在神宝座的右边。”(来十二:2)
“这些人是从大患难中出来的,曾用羔羊的血,把衣裳洗白净了。”(启七:14)
1966年开始的文化大革命,那是神为大陆弟兄姊妹预备的一炉炼金的火。我的姨婆倪师母(张品蕙姊妹)年轻时毕业于燕京大学生物系,她一直是倪弟兄的贤内助。公公(倪弟兄)入狱后,她也曾一度入狱受审,出来后仍一直受监视。在文革中,因为公公的缘故,她被打成“反革命分子”,受到许多非人的折磨。婆婆身体很不好,有非常严重的高血压及高血压心脏病,但自始至终,她一直坚心仰望主,“像羊被牵到宰杀之地,在宰羊的人手下默默无声。”
1966年夏的一天,她被一群红卫兵关在一个小房间里连续审拷昼夜,我们在外面只听得阔皮带一声声的抽打,并夹杂谩骂恐吓声,一声声像是抽打在我们心 上,但却没有听见婆婆一声言语。过了许久,婆婆被押出来,眼睛被打肿得像青馒头,身上也多处伤痕。那期间她的眼镜被打碎几副,连最起码的人格都得不到尊 重。多次她被揪斗、游街。有一次,她同另外两位老姊妹一起被迫高举双手,手上套着鞋子,头上戴着纸做的尖顶帽子,项上挂着牌子,被责骂、凌辱,勒令她们这 样站着达数小时之久,目的是要她们放弃信仰不再信耶稣。但几个钟头下来,她们三位都一声不吭。最后红卫兵忍不住了,分别一一喝问她们:“你们到底还信不信你们的耶稣?”她们个个都坚说:“信!”红卫兵们气极了,拾起地上的皮鞋,一下一个扔到她们身上、头上,说:“带着你们花岗岩的脑袋见上帝去吧!”感谢神!在所有的逼迫中,神与她们同在,赐力量坚固她们。事后当她们谈到这次遭受的逼迫,都觉得很喜乐,因为她们算是配为主的名受辱。
红卫兵把所有的圣经、诗歌都抄家抄走了,但婆婆还是千方百计地藏下几本。有一次,外面小孩爬墙,发现屋檐下有两本圣经,婆婆又被定罪一次。我信主之后,一次偶然在大厨后面发现一本小圣经,真是欢喜万分,那也是婆婆藏的。在那些没有圣经的年代里,这一本小小的神的话,对于我实在太珍贵了。
每天早晚两次,婆婆被勒令要打扫弄堂,当时她虽在狱外,却真是比在监内的犯人还要惨遭凌辱和迫害。任何过路人,包括小孩子,都可以随意过去打她、唾她,因为她是众人所弃的“反革命分子”。有一次在斗争她的大会结束后,婆婆对我说:“我们成了一台戏,给世人和天使观看(林前四:9)。圣经上早就命定了。”在所有的逼迫中,她总是在批斗她的台上一直不停地默默祷告,始终是靠主站住,没有羞辱主的名。日复一日,年复一年,所有见过她的人都喊她“白头发”,人人都知道,那位满头银发的老太太,是为了她和她丈夫的信仰,受到监督劳动和非人待遇的,为了主耶稣的名,成了一个众目共睹的美好见证。
1970年,当我被送去农村插队落户时(当时所有初中毕业生都被送到农村当农民),婆婆每天都为我祷告。1971年春,我临别上海前,婆婆流着泪对我说:“主耶稣是我们最宝贵的救主,你无论如何总要牢牢跟着主。”我在农村蒙了主很奇妙的带领和极大的恩典,我想这一定是与婆婆的代祷分不开的。
公公(倪弟兄)于1952年被捕之前,有机会为教会事宜去香港,当时有许多人都劝公公不要再回大陆,但是他受神的呼召,要“回大陆去,与弟兄姊妹一同受苦”,他很清楚神为他定的道路──“我的结局,不是被提,就是殉道。”他回来后不久,即被捕关入上海提篮桥监狱。1967年,15年刑期满了,政府要他公开声明放弃信仰,因为他们对外已经公开造谣说:“倪柝声放弃信仰了”。但这个考验对他又算得了什么?主对于他实在是太宝贵了!为了对主忠诚,他再一次放弃所谓的“人间自由”,在狱中十五年之后,甘心继续为主作囚徒。这一次公开表态引来了更大的逼迫,公公被关在两个流氓刑事犯一起,小流氓的任务就是逼他放弃信仰,他们越狠地虐待他,自己就越能立功。曾听狱中难 友说,公公的一件棉背心也被他们打烂了,可想而知,为了不放弃信仰的表态,他吃了许多苦。当他们的目的不能达到,而他的刑期又满了,公公就被秘密押送去上 海郊区的青浦县青东劳改农场。此期间,婆婆还被批准去看过他一次。然后又突然音讯全无好几个月,事后才知,公公又被押到更苦的地方──安徽深山里的白茅岭劳改农场。
1971年11月婆婆中风去世,在这之前已被允许与公公通信(曾有一段时期连通信都不准,所以无人知道公公当时的去向)。婆婆从中风开始到去世仅仅三天,这也正是她在世时向主所求的。她患有很严重的高血压及心脏病,知道最后总会死于中风,所以她一直盼望一旦发生中风就很快被主接去,既不拖累别人,也免得受长时间之苦痛。感谢主,听了她的祷告成就了她的心愿,从中风昏迷到去世只有三天,在医院里十分平安、全无痛苦地被主接去。
婆婆去世后,我们不敢马上报告公公,因为知道他的心脏很衰弱,恐怕一下难以承受如此的打击。过了一个多月,才断断续续写信告诉他。但是自从婆婆病危直至此期间,他似乎有预感,不断来信询问婆婆的身体情况。他信中十分迫切地想早点出来与婆婆团聚,好在病中服侍她。当大姨婆(倪师母的大姊)与孙女一起于 1972年初去安徽看公公时,知道他的心脏极其衰弱,婆婆的去世是一桩使他万分痛心的事,因婆婆是他唯一保持联系的亲人。事后听同房间的难友说,公公一直 有一个心愿,想早点结束他的刑期出来与婆婆团聚。他知道婆婆的身体非常差,他曾说:“我的刑期,像是与我妻子的生命在赛跑,如果我能在她还在世的日子出 去,就可以好好服侍她,她为我受了许许多多苦。”
公公入狱前,为教会的事奉一直奔走于全国各地,入狱 后一下又是二十年,他们两夫妇在一起的日子实在屈指可数。当公公被捕时,他们捏造了许多骇人听闻、莫须有的罪名,来诬陷他,当时蒙蔽了许多弟兄姊妹。但婆婆对他最了解,婆婆说:“他们说他的这些事,都是根本没有的。”公公为主的缘故,承受了许多非人所能承受的冤屈。公公关在提篮桥监狱时,婆婆还可以每月一 次送去少量的食物及日用品,以后转去青东农场,婆婆也去看过他一次,再后就没有见面的机会了。为婆婆的离世,公公非常难过。听同牢的人说,他曾悲痛多日。 四月二十二日从他给大姨婆的信中,知道他“维持自己的喜乐”。这些年来,一个又一个重重压迫,并没有使他气馁,因为他所仰望的,乃是这位叫我们永不失望的神。
1972年6月,我们接到农场的通知,说公公已去世。我和大姨婆赶去农场,但到了那里才知道,他们已将他火化,只能看到他的骨灰了。他的难友告诉我 们,当时他的心脏病发作非常厉害,他们在他垂危时,将他放在一台拖拉机上拖去四十里外的农场医院。这四十里坎坷不平的山路,被拖拉机载着颠簸,就是身体好的人也受不了,更何况是一个最忌震动的心脏病垂危病人。在途中公公就被主接去了。临离去前,他留下一张纸在枕头下面,那是用非常颤抖的手写下的几行大字,公公要用他一生的经历,来证明这个他至死都持守的真理──“基督是神的儿子,为人赎罪而死,三日复活,这是宇宙间最大的事实。我信基督而死。倪柝声。”当农场干部将这张纸给我们看时,我祷告主让我快速将它背下来记在心里。
劳改农场干部还说,他写了许多笔记本的“反动日记”,那是他在狱中对于真理的新的亮光,但这些珍贵的手稿都无法从狱中拿出来,除非神特别保存它。
公公在狱中有一难友将他的一些情况告诉我们,公公在世时一直为此人祷告,当公公去世后不久,他得救归主了。
公公去了,他至死忠心地带着他血染的冠冕被主接去了。虽然神没有成就他最后的心愿,能活着出来与他妻子团聚,但主却预备了更好的──他们团聚在主前。“这些人都是存着信心死的,并没有得着所应许的,却从远处望见,且欢喜迎接。”(来十一:13)“所以神被称为他们的神,并不以为耻;因为祂已经为他们预备了一座城。”(来十一:6)
他们去了,如同许多的殉道者一样,是神为祂自己的名呼召出来的一班得胜者,是这个世界所不配有的人。如今他们安息了,但是他们的祷告、他们的果子,却一直在那里蒙神悦纳,在那里起着不息的功效,他们的脚踪也激励我们更忠心向着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