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11) - 릴리 슈의 책은 공산 정부를 대변하고,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대적함(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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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근 목사와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 (11)
- 릴리 슈의 책은 공산 정부를 대변하고,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대적함(결론)
글쓴이: 코람데오
이 글이 릴리 슈의 책인 “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의 실체를 밝히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평소에 워치만 니를 존경하던 분들, 특히 소위 지방교회 측 성도들은 그럴듯한 이야기와 함께 워치만 니가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일들을 저질렀다는 유동근 목사의 유튜브 내용을 대하고, 큰 충격과 당혹감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관련 자료들을 추적 조사한 후에, 릴리 슈의 책이 사실을 기록했다기보다는, 중국 격변기에 인권이 극도로 억압된 상황에서 공산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진 자료들에 기초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미국 예일대 역사학 석좌 교수인 조너선 D. 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찾아서』(1991)에 따르면, 1951년 말에 상하이에만 만오천 명의 선동가들이 활동했습니다(537쪽). 또한 1952년 2월 한 달 동안 상하이에서만 3천 번의 군중 집회가 열렸고, 21만 개의 고발장이 정부에 접수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52년 4월 10일에 워치만 니가, 그 뒤에는 약 1천 명의 지방교회측 인도자들이 새로 들어선 마오쩌둥 정부에 체포되었습니다.
한 편, 워치만 니가 동역자들의 만류에도 홍콩에서 중국 본토로 돌아온 것은 주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새 정부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된 후에, 남겨진 중국 성도들이 워치만 니의 적은 무리에 합류하여 삼자교회에 가입하라는 압박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워치만 니가 인도하는 모임의 인수가 거의 10만에 육박하자 중국 정부는 은밀히 이들을 분쇄할 단계적 전략을 수립하여 하나씩 실행에 옮겼습니다.
첫째, 릴리 슈도 인정한 것처럼 그들의 무기는 정치적인 압박은 물론 “(날조된) 워치만 니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국 공산 정부로부터 소위 음란행위로 고발된 교회 지도자들은 워치만 니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 가정의 설립자인 찡 디엔잉도 그 희생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 단체의 내부 고발자의 말만 들으면 그는 추잡한 인물이고 죽여 마땅할 죄를 지은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가정의 헌신되고 분별된 삶에 공산당도 감동 받을 정도였습니다. 검색창에 “예수 가정”을 쳐면 나오는 자료들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새 정권 차원에서는 인민들의 마음이 나뉘어 이들에게도 향하게 하기보다는 어떤 죄목을 뒤집어 씌우든 이들을 매도하여 해체하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가정은 정부의 의도대로 결국 1952년에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워치만 니가 이런 결과를 예견하고 1949년에 가장 친밀한 동역자였던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가도록 결단하지 않았다면, 그가 인도했던 적은 무리도 유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사역은 위트니스 리를 거치면서 중국을 벗어나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동근 목사가 워치만 니는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유감입니다.
둘째, 중국 정부는 아래에서 소개할 격변기의 혼란 속에 워치만 니의 동역자들 혹은 그와 함께하는 성도들 중 일부도 정부 편으로 돌아서도록 회유하여 그들이 워치만 니와 교회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릴리 슈(許梅驪), 임종상(林鍾祥), 장시캉(張錫康)입니다. 릴리 슈는 이러한 첫째와 둘째 출처를 참고해서 책을 쓴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은 일부이고, 대부분이 오염된 자료들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릴리 슈도 책을 쓸 때 많이 의존했던 장시캉 형제는 후에 회개하고 ‘워치만 니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는 부분을 모두 삭제하고 수감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워치만 니의 부도덕한 행위들이 사실인지를 가장 정확히 아는 길은 워치만 니의 배우자인 채리티 장 자매의 반응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런 일은 그 당사자의 아내가 가장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워치만 니의 아내의 반응은 다음 두 마디로 압축됩니다. 첫째는 “최종 심판은 (지금 이 공산 정부 사람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하늘에서 있게 될 것이다.”라고 반응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워치만 니)에 관해 그들이 말한 일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都是根本没有的).”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참고로 릴리 슈는 자신과 ‘두 여자 동역자’가 워치만 니의 부도덕한 일로 상처를 받아 믿음을 버렸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녀의 논리가 옳다면, 가장 먼저 상처받고 믿음을 버렸어야 할 사람은 워치만 니의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아홉 번째의 글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부부로서 서로를 끝까지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했습니다. 또한 둘 다 온갖 굴욕과 박해에도 죽기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부가 죽기까지 서로 사랑하고 믿음을 지킨 삶의 간증을 존중하고 믿어 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장시캉 형제의 회고록 증언도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적극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워치만 니에 대한 참소는 위조 변조된 증거에 기초한 것입니다.
유동근 목사는 관련 유튜브에서, 1) 자신의 아내인 신O봉 사모가 릴리 슈 책을 지금 번역 중이다. 2) 판권을 얻으려고 저자와 접촉 중이다. 3) 아들이 운영하는 벧엘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이다. 4) 이름 있는 목사를 책 번역자로 내세울 것이다. 5) 워치만 니의 부도덕한 일들을 널리 알림으로 국내 책방에서 워치만 니 책들이 사라지게 하겠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만일 그대로 실행된다면, 겉으로 드러난 번역자는 <영에 속한 사람>을 번역했던 정O섭 목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 목사는 지방교회 측에 의해 자신의 표절 문제가 폭로되어 <그것이 궁금하다>라는 책자를 회수해야 했던 일 등 그동안 여러 일들이 얽혀 왔기에, 반격을 가할 호재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 목사가 개인적으로 잘 안다고 여러 번 언급한 최 모 목사, 그리고 유 목사 본인도 지방 교회 탈퇴자 자격으로 추천사를 써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이 많이 팔리면 아들의 출판사업에도 당연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면에서 어떤 이득이 눈에 보이더라도 저는 유동근 목사가 장시캉 형제의 회고록을 입수하여 교차 검토하기 전에는 릴리 슈의 책 한국어 출판 계획을 내려놓기를 진심으로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만일 강행한다면, 그런 결정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롬 14:10).
참고로 장시캉 형제는 어려서부터 워치만 니를 잘 알고 지냈습니다. 워치만 니가 폐결핵으로 투병할 때 그의 부친이 자신의 집에 그를 머물게 하고 24시간 간병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장시캉 형제는 워치만 니의 사설 도서관 사서였고, 제약회사를 운영할 때 재정담당 지배인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이런 배경 덕분에 소위 부도덕한 일을 했다는 자필 자백서가 워치만 니의 필체가 아니고, 증거물들 위에 한 서명도 그의 서명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가 침묵하면 릴리 슈처럼 출세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진실을 밝히고 감옥에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미국에 있는 동안 역시 미국에 사는 릴리 슈에게 이제는 그만 회개하라고 여러 번 권면했다고 합니다.
끝으로, 저는 릴리 슈(유동근 목사)가 소개한 워치만 니에 대한 공격적인 자료들이 그 당시 어떤 분위기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방증 자료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는 필리스 탐슨이 쓴 <내키지 않던 중국 탈출>(OMF, 2007) 등의 내용입니다. 중국 격변기에 내지 선교회(CIM) 선교사들이 철수할 때의 사회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Central China Normal University 역사서적 연구집 제2호(2016: 58-78쪽)에 실린, Zhang Le의 논문이 다룬 구렌엔(Gu Ren-en) 사례 내용 일부입니다(https://www.fx361.com/page/2016/1008/16414582.shtml).
참고로 위 논문의 요지는, 1951년에 중국 정부가 첫 번째로 교계 인도자를 처리한 이 사례가 훗날 기독교 인도자를 고소할 때 모델(mode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첫째, 그들이 정치적으로 미 제국주의의 간첩이고 반혁명분자이며, 둘째, 재정적으로 자신을 위해 재정을 착취했고, 셋째,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도 정확히 이런 내용(각본)으로 고소를 당했고, 릴리 슈와 유동근 목사가 그것들을 지금까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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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던 중국 탈출>에서 발췌
“중국에 있는 선교사 사회에서는 스웨덴 선교회의 레넬 양이 갑자기 잡혀가서 인민재판에 넘겨져 처형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로 인해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 레넬 양의 죽음에 이어 또 여러 곳에서 다른 선교회의 선교사들이 폭동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위의 책, 20-21쪽).
“2년 전 여행을 함께 했던 존 스템과 그의 아내 베티가 당시 아직 무법자들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대중 앞에서 공개 처형당했다”(34쪽).
“인민재판이 시작되었다. 부유한 지주들, 유명한 관리들, 해외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다. 공공장소에 단상을 만들었다. 죄수들은 밧줄이나 쇠사슬에 묶여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곳에서 인민들이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재산을 몰수하라!”, “노동 수용소로 보내라!”, “처형하라! 처형하라!”(49쪽)
“집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 일상사가 되었는데 그것도 보통 밤에 그렇게 하였다. 의심스러우면 데려다가 심문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심문이 가장 나쁜 벌이었다. 몇 시간이고 계속 질문을 해대면 심문하는 사람이 탐문을 마쳐도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 죄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입력되는 것이었다. … 체포되었을 때 반항하거나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발회의에서 조용하던 사람들은 곧 화를 내는 척이라도 해야 함을 곧 배우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탄핵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49쪽).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 사실 자신조차도 믿지 않아야 했다. 당에서 인정하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 슬로건을 배우고 반복해서 그것을 외워야 하며 마음속에서 의문이 일어나면 그것을 무시해야 한다. 가족 사랑 같은 본능적인 취향은 부인하는 것이 낫다.”(50쪽)
“체포, 구금, 인민재판, 고발 회의, 재산의 몰수, 정치 사범들을 실은 트럭 등은 사회의 모든 공동체에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63쪽)
“그러자 잭이 사형 집행장에 끌려나가 처형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짧은 총소리가 들리더니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현장에서 끌려 나왔다. 총에 맞은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그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곳에 버려두었다”(67쪽).
“그들은 언제까지나 호전적인 무신론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반항하면 노동 수용소나 감옥에 가는 것이고 그들의 말을 따르면 주님과 주님의 종들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이미 그들이 시달림을 당하며 고난을 견뎌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서서히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찌르는 심문과 이전 동료를 모욕하도록 공포를 주는 이야기들이었다.”(107쪽).
“그때는 날마다 처형될 사람의 명단이 벽에 붙었다. 하루에 천 명씩 감옥에 잡혀가고 있다고 사람들은 숨을 죽이면서 말하고 있었다. 양쯔강 언덕에는 어두워질 때까지 언제나 사람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러면 친척들이 몰래 가지고 가서 매장하는 것이었다”(144-145쪽).
“그리고 대학에 다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믿음 때문에 처형당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205쪽)(릴리 슈는 이런 상황에서 교회 동료들을 공개 참소한 대가로 의대를 졸업함).
<가뭄에도 푸른 잎>(이소벨 쿤) 등에서 발췌
“2월이 되자 다른 곳에서 우리 선교사 중 한 명에 대한 거짓 고발 소식이 흘러나왔다. 중국인들에게 특히 사랑받는 선교사가 한 명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가장 비열한 비난을 날조했다(적절한 사례는 Canton에서 사랑하는 Dr. Wallace에 대한 거짓 고발과 살해임.) Arthur [CIM 선교사인 Mathews]는 무엇보다도 피고인 선교사가 여종에 대한 부도덕한 처우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Isobel Kuhn, Green Leaf in Drought (Kent, UK: OMF Books, 1958), p. 34 (https://mall.duranno.com/detail/detail.asp?itm_num=3110100000)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대의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래서 선교사를 고발할 때 거짓 증인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의 이야기가 맞물리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는 틀이 만들어진다.” 위의 책, p. 104
“Maryknoll(가톨릭 선교사)은 성적인 난잡함과 부도덕한 행동이 포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 Beatrice K. F. Leung and William T. Liu, The Chinese Catholic Church in Conflict: 1949-2001 (Boca Raton, FL: Universal Publishers, 2004), 63쪽( https://www.amazon.com/Chinese-Catholic-Church-Conflict-1949-2001/dp/1581125143)
"항저우에서의 구렌엔의 범죄"
항저우 기독교 위원회 부회장 Niu Zhifang [鈕志芳] (pp.27-28)
“(4) 여성에 대한 구렌엔의 모욕은 어디에서든 동일하다. 그가 1950년 5월 항저우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남편을 잃고 서너 명의 자녀를 둔 광지병원 간호사가 먼저 그에게 속았다. 그는 떠밀려 항저우를 떠나야 했다. 그와 항상 친하게 지냈던 목사가 있었는데, 구씨는 이 목사의 누나도 모욕하려 했다. 그런 설교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내가 처음 [공산군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상태이고 정치적 이해도도 높지 않아서 인민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했고 애국심도 없었다. 구씨가 (정부를) 반대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동료들에게 구렌엔이 우리와 관련된 곳에서는 설교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고, 동료들에게 그의 말을 듣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는 구씨의 활동에 대해 더 이상의 필요한 경고와 조사와 폭로는 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반혁명 선전을 하고 신자들을 더욱 담대하게 속였다. 또한 난 항저우의 우리 동지들 중 일부를 비판한다. 구렌엔의 삶은 타락했고 그는 설교할 자격이 없다. … 그는 치유를 받으러 온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금전적 손실을 입혔고 그로 인해 사망하게 했다. 이런 일의 실상은 종교를 빙자해 간첩 활동을 벌이는 극악무도한 적들을 은폐하는 것이다.”(28쪽)
"기독교 쓰레기 구렌엔 고발"
2) Qiao Weixiong [喬維熊], 톈진 기독교 개혁 및 추진 위원회 부위원장 (28쪽)
“어느 날 아침, 나는 Jiaodaokou Street에서 매우 비열한 태도로 몇몇 젊은 여성을 도우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 그를 만났다. 그때 나는 동료 청년 회원들에게 그의 '설교'를 듣지 말라고 충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이 그를 찾으러 애슬리 홀에 갔지만, 그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 했다. 여자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병원으로 보내졌다. 즉시 그 소문이 교회 전체에 퍼졌지만, 왜 그 여자가 화를 냈는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4월 20일 자 베이징 인민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그 여자가 구렌엔에게 강간당해 정신 이상이 된 양슈잉[楊秀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불쌍한 동생은 산적 구렌엔의 잔혹함 때문에 오늘날까지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다. 구렌엔은 10년 전에 나쁜 행실을 했던 기독교의 쓰레기였다. 그가 반혁명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 스파이[아마도 Douglas MacArthur를 가리킴]의 부하가 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28쪽).
출처: Tian Feng(1951/5/8) 제262-263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