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자네도 주의 길을 가려는가?
- 새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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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선가 이와 유사한 제목의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이 앞으로 신학을 하려는 청년들에게 사랑어린 조언을 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가 '주의 길을 간다' 고 할 때의 의미는 [신학교] 졸업 후 세속적인 직장을 갖지 않고 소위 성직인 [목사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주의 길을 가는 것'이 목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목회자 중에는 주의 종으로서 자신을 부인하고 절대적으로 주의 뜻을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야 주의 종이요 주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학교 졸업 후 그 삶이 참으로 자기 부인의 기초 위에 주를 사는 방식으로 목회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나 디엘 무디나 워치만 니처럼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어도 그 존재와 삶이 참으로 주의 길을 간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 전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그 당시의 최고신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의 길을 가게 한 것은 그런 신학수업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의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가말리엘로부터 배운 구약의 지식만으로 소위 주의 일을 했다면
그것은 주의 길을 간 것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근거를 제공합니다(딤전1:13, 빌3:5-9).
(그러나 그가 구약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은 추후에 그가 히브리서를 쓸 때 크게 유용했습니다.)
2.
여보게, 자네도 주의 길을 가려는가?
저도 오늘, 먼저는 저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게 되시는 모든 분들에게 이런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위에서 처럼 신학교를 갈 예정이라거나 목사 안수 받은 후 성직인 목사님이 되는 그런 길을 가려는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갈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이런 의문이 떠 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길을 가셨는가? 제게 이런 질문에 답하라고 한다면 저는 그 답변은 신약 전체 내용을 필요로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의상 그것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아버지로 인하여 사신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6:57상).
즉 주님이 성부와는 구별된 인격이시되 그분 자신을 살지 않고 아버지의 뜻만을 위하여, 아버지가 보여 주신 바 대로,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아버지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표현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당신이 그런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 자신을 먹음으로 그분으로 인하여 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57하).
그렇다면 역대로 사람 중에는 누가 이런 주의 길을 누가 갔는가? 먼저는 사도 바울이 갔습니다(갈2:20, 빌1:21). 그외에도 주님을 참 되게 사랑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갔고 또 지금도 가고 있습니다.
3.
요 며칠 동안 구약 여호수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적지 않은 빛을 새삼 얻게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진군하기 직전의 상황은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가 올 (영적) 전쟁에 직면해서 한 일은 무기를 갈고 닦는 것이 아니라 뜻 밖에도 자신들 안에서 육체를 끊어내는 <할례의식>을 집행한 것이었습니다(수5:2-9).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영적인 전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예표된 그리스도 자신을 얻는 삶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족속들로 예표된 다양한 영적인 대적들을 처리하는 길을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구든지 옛사람을 가리키는 육체를 끊어 내는 것인 이 [할례]의 체험이 없다면...그 사람은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에서 실력있는 교수 밑에서 배우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또 최고 학위를 얻었다고 해도 아직은 주의 길을 감에 있어서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여호수아를 여러 번 읽었지만 이번처럼 그렇게 이 (영적인) 할례문제가 엄중하게 제게 다가 온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육체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움직일수록 하나님의 대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8:7-8).
가나안 진군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 외에도 유월절을 지켰고, 만나가 그치자 그 땅의 소산을 먹었으며, 군대장관의 이상을 보았습니다. 이런 항목들의 영적인 의미를 알고 난후 보는 이런 성경본문은 맛이 예전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이 문제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보게 되자 가슴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4.
사실을 말하자면, 소위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참되게 거듭나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은 마땅히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말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에 근거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leaving us an example, that ye should follow his steps)(벧전2:21).
만일 우리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주의 길-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날에 어찌 그분을 뵐 수 있겠습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그런 실재가 없거나 거듭난 후 아예 세상과 자아를 사랑함으로 다른 길을 간다면 그 날에 그런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실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너를 잘 모르겠구나!'(마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