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글 4 - 이인규님의 삼신론 사상은 구원론에도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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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근본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지금 복잡한 신학이론 자체를 위해서 삼위일체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이 토론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거듭날 때 생명으로 영접하였고 지금은 우리 안에 사시는 친근하신 그리스도, 매 순간 우리 자신은 부인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새 생명과 새 인격으로 살아 표현되시는 기묘자(사9:6)요 하나님의 비밀(골2:2)이신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신지를 더 깊이 알고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엡1:17하). 그런데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는 간절한 간구 없이 단지 평소에 알고 있는 단편적인 신학지식을 풀어놓음으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마11:27, 16:16-17)?
바라건대, 이러한 토론을 하는 당사자나 토론의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은 자신이 삼위일체를 안다고 자만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데 처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토론을 통하여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벧전5:5).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메마른 신학 지식은 공허하나, 우리 안에 계신 사시고 참되신 인격을 더 알고 누리는 기쁨은 크다는 것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본인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zoe)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10). 그런데 우리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말씀을 통해서 "생명"은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11:25, 14:6). 또한 우리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5:12)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 밖의 생명이신 주님이 믿음의 영접을 통해 '특정 사람 안의 생명'이 되어야 함을 봅니다(요1:12, 골3:4). 이처럼 밖의 생명을 자기 안의 생명이 되게 한 자가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다른 부분은 우리가 영접한 생명이신 아들 하나님이 마지막 아담이 죽고 부활하신 분인 생명 주는 영 자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5:45). 이 점은 요한복음 3:6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 영(생명 주는 영)으로 난 것은 영(사람의 영)이니'라는 말씀으로도 증명됩니다. (저는 이곳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이 위와 같은 체험을 하셨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요즘도 성경지식은 많으나 '거듭남을 모르는 이스라엘 선생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요3:1-10).)
1. 지방 교회들의 삼위일체관
그러나 바로 고전 15:45의 이 대목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따지는 분들은 '그렇다면 당신들은 삼위의 2격(마지막 아담)= 3격(생명 주는 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냐'라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접한 생명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함께 주님 앞에서 빛 비춤을 구하고 함께 알아갈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생명은 누구입니까? 다만 성령 하나님? 아니면 다만 아들 하나님?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등등의 의문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성육신 한 분에 대한 이해(요1:14)
반복해서 말씀드리건대, 지방 교회들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마지막 아담'(고전15:45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사람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으신 상태로 상호내재 하신 '아들 하나님'이 죄는 없지만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 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이 때 매우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지방 교회들이 아버지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신다고 말할 때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 계심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두 가지를 함께 믿고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말씀들(요14:10-11, 20, 17:21)과 아버지가 여전히 하늘에도 계심을 증거하는 말씀들(마6:9, 32)을 가감 없이 다만 믿고 받아들인 결과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이인규님은 자신의 오해를 근거로 '양태론' '성부 고난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안에만 계신다고 한다'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안이다' '예수님을 피조물만이라고 한다'라며 임의로 왜곡시키고 계십니다. 저는 이러한 오해와 거짓된 정죄가 지금처럼 위트니스 리의 책자에서 다음 토론 글에서 써먹을 결정적인 단락들만 찾아내기에 바쁘신 이인규님의 토론자세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토론 중에 하실 수 없다면 이 토론이 끝난 다음에라도 이인규님이 시간을 들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위트니스 리의 신약의 결론―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책자를 차분히 보실 기회를 가지실 것을 권면 드립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말하는 삼위일체는 다만 건조한 신학 이론만이 아닙니다. 지금 믿는 이 안에 살아 계신 분에 대한 생생한 설명입니다. 님의 평소에 익숙했던 틀에는 다소 안 맞는 부분이 있는 듯해도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익명의 지체들이 이인규님에게 신약의 결론 전권을 선물한 것은 사실 그 책들을 통해 님 안에 살고 계신 분을 더 풍성히 알고 누리시길 바라는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2) 부활하신 분에 대한 이해(고전15:45)
고린도 전서 15:45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생명 주는 영'이 우리가 거듭날 때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한 바로 그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요3:6). 이제 조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위 구절에서 '마지막 아담'이 지상사역시의 "그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생명 주는 영'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생명 주는 영을 1) '또 다른 보혜사 성령(제 3격만)'으로 보거나 2) '예수의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1) 처럼 해석한다면 2격=3격의 결과를 가져와 소위 양태론 시비에 휘말릴 수 있으며, 2) 처럼 해석한다면, 이미 성육신 이후부터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사람의 영이 있으셨는데(막2:8원문) 부활 후에 새삼스럽게 사람의 영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성경적인 해석은 본문 문맥 그대로 '마지막 아담'은 '부활 전 예수님'으로 '생명 주는 영'은 '부활 후의 예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를 포함한 지방 교회들의 입장입니다. 이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부활 전 후로 달라진 것은 그분의 육신(인성)이 부활 전에는 '육의 몸'이었지만 부활 후에는 '신령한 몸'이 된 것뿐입니다(고전15:44). 그러므로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으신 상태로 상호내재 하신 '아들 하나님'이신 그분의 신성면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이제 이 '생명 주는 영'을 알기 쉽게 도식화한다면 [생명 주는 영 = 아들 + 구별되는 방식으로 상호 내재하시는 아버지, 성령 + 영화롭게 된 예수의 인성]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저나 지방 교회들처럼 고전15:45을 '아버지, 성령님이 구별됨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신 부활 전 예수'(마지막 아담) = '부활 후 예수'(생명 주는 영)라고 본다면 위격의 혼돈이 거론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육신 때나 인생을 사실 때나 죽음, 부활 그 어느 때이든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위격의 구별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사셨던 아들 하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분을 우리의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일2:22-25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강조하면 우리가 영접한 하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이 분은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예수님을 가르치거나 영접케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삼위일체관의 어디엔가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삼위일체론이 잘못되면 구원론에도 심각한 하자가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이인규님은 단순히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등을 거치셨음 말하는 성경 사실들을 묘사하는 용어인 '과정을 거친'이라는 표현, 그러한 주님이 부활 후 육신조차 영화롭게되어 생명 주는 영이 된 것을 가리키는 '최종 완결된 영'이라는 표현들에 대해 공연한 트집을 잡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 자체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인규님의 진리인식에 더 강한 빛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고전15:45가 말하는 생명 주는 영 안에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되었다는 지방 교회들의 주장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성경적입니다. 만일 반대로 생명 주는 영 안에 인성이 포함됨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부활 후에는 부활 전의 인성을 벗어버리셨다는 이단적인 위험한 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부분의 진리는 많은 분들에게 닫혀있습니다. 정통 개혁신학자 중에는 앤드류 머레이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이 주제에 생소하신 독자들을 위해 앤드류 머레이의 글을 일부 인용하여 소개 드릴까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의 영'(총신과 합동신학원을 졸업한 임석남 님이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년) 제 5장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과 함께 육신을 입으신 채로 가장 거룩한 곳에 들어가셨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라고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인간이자 그 우두머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humanity)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神人)의 영' - 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 - 으로서 임하실 수 있었다. 그는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각 사람 안에 계시면서 예수님의 인격적인 생명과 현존의 영임과 동시에 신자의 인격적인 생명의 영이 되신다(43-44쪽)'.
위 인용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신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이심을 말한 대목은 바로 고전15:45의 생명 주는 영과 요7:39에서 '예수께서 영광 받지 못하신 고로 저희와 함께 계시지 않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위 앤드류 머레이 책자 관련 본문 전체를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여기서도 한가지 유의할 것은 저와 지방교회측은 생명 주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심(롬8:10)을 강조함으로 마치 하늘에서 중보기도 하시는 승천하신 예수님은 부인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도 확실히 믿습니다(롬8:34).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상식입니다.
2. 교회역사상 삼위일체 논의에 대한 요약
이인규님은 지난 토론에서 마치 '정통교회 삼위일체'는 곧 '니케아신조'인양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나 지방 교회들이 니케아 신조를 믿지만 그 한계도 있음을 지적한 것을 가지고 그것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니케아 신조 내용은 정당하며 옳지만, 니케아 신조 내용이 정통 삼위일체 항목 전체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저의 관점은 매우 균형 잡힌 것이며 님의 주장은 치우친 것입니다.
루이스 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2권 신론(고영민 번역, 기독교문사, 1994년)에서 '역사적으로 본 삼위일체 교리'를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로 양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종교개혁이전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 최초로 삼위일체를 언급한 터툴리안, 아리우스, 일위신론자들, 삼신론자들의 출현을 말한 후 4세기의 니케아회의를 언급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회의, 동방의 다메섹 요한, 서방의 어거스틴까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종교개혁 이후시대를 말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더 이상 발전 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빗나간 이론들을 몇 개 소개한 후 칼 바르트(Barth)를 말하면서 자신의 개괄적인 설명을 마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 소위 정통 삼위일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니케아 신조'에서 "기초를 세우고"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키아 교부들을 거쳐) 어거스틴에게서 "잠정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 이인규님처럼 니케아 신조 자체가 마치 정통교회 삼위일체인양 주장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또한 정통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이인규님이 제가 인용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글이나 어거스틴의 말을 가볍게 취급하는 태도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말하는 지방 교회들을 정통교회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로 단정하는 이인규님의 경솔함이 제게 이런 부차적인 해명과 반박증거들을 제시케 합니다. 상식 안에서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필요가 없는 해명이겠지만 선량한 독자들의 오해를 예방하도록 저는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지적하는 몇 분의 말을 인용할 것입니다.
'니케아(신조)는 4세기 교회의 모든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위일체 논쟁이 니케아와 더불어 더 진지해지기 시작하였다. 니케아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 신조에 서명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신조가 이해된 방식에 있어서는 서명자들 사이에 광범한 차이들이 있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76쪽).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관한 고백이 지나치게 간단하다.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나 동질인지 혹은 발출인지 조차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아직도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아타나시우스와 세 갑바도기아 신학자들 및 힐라리우스 등을 통해서 더욱 발전되고 정립케 된다'(차영배, 삼위일체론, 134-135쪽).
'(니케아 신조의) 성령에 대한 고백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고백과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하다. '또 성령을 믿는다'로 되어 있을 뿐 아무 설명이 없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백만으로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권위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도신조의 내용구조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삼위일체론의 표준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삼신론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언급하면서도, 그 셋이 하나라고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이종성, 삼위일체론, 85-86쪽, 머리말).
저는 의도적으로 한국교계 내에서 소위 정통교단 신학자 분들의 주장을 인용했습니다. 이인규님은 지금 앞글에서 제가 인용했던 장신대 출신의 이동근 목사의 지적처럼 결국 정통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어거스틴을 정죄하고, 이종성 박사를 포함하여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말하는 분들을 정죄하고, 장신대학 김명용 교수를 이단으로 만드는 자신의 소위 "정통교회의 삼위일체 기준"을 성경과 일반 상식에 맞게 재 정의하시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그 다음에 지방 교회들의 삼위일체를 비교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양측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의 원론에서는 일치할지 모르나 이인규님의 '위격의 상호관계 안에서 인격 안에 인격을 부인하는 삼신론 이단사상'으로 인해 각론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님의 위와 같은 '이인규식 상호내재관'은 님의 심각한 이단사상의 핵심 원인입니다.
3. 이인규 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을 밝히 드러낼 세 가지 기준들
이인규님은 지금 이상한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삼위가 존재론적인 양식에서는 상호내재 하시지만,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됨으로 상호내재 하지 않는다(이 부분을 이인규님 말대로 인용하자면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 사이에서 말해지는 상호내재는 '존재'와 '관계'를 포괄하여 각 위격 간에 위격의 구별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너무나 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아래 두 가지만 재차 소개해 보겠습니다.
'불(Bull) 주교는 '셋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시고,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시며 서로를 관통하신다'고 말합니다(Defensio Fidei Nicaenae II, 9. 23).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라고 말합니다.
이인규님은 이 문제에 대한 관찰방에서의 황OO님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피해간다고 해도 '관계에 있어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인규님의 반복되는 주장은 문제가 많은 이단사상입니다. 이인규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실제 인격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지상의 아들의 실제 인격에 상호내재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실제 인격이 아니라 편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속성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요14:10-11)을 인격과 인격간의 상호내재가 아니라 실제 인격체는 제외된 편재성 안에서의 상호내재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처럼 이인규님의 상호내재 개념은 성경과도 다르고 교부들이 말한 '셋이 서로 안에 거하심과 한 위격 안에서 다른 두 위격도 만나는 의미의 상호내재'와도 다른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감추어진 이인규님의 삼신론 이단 사상은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질문과 답변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밝혀질 것으로 봅니다. 이인규님께 부탁드립니다. 피하지 마시고 아래 질문들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1) 경륜적인 방면에 있어서 삼위의 상호내재에 대한 관점의 차이
이인규 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은",
1) '성부하나님만'이시다(성부고난설 이단사상).
2)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은 채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이 때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심과 동시에 하늘보좌에도 계신다(저와 지방교회측의 주장).
3) 아버지의 실제 인격체는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는 편재하시는 속성으로만 계시며 결국 아버지의 실제 인격체는 제외된 '아들 하나님만'이시다(이인규님 주장).
라는 1) 2) 3) 중 님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만일 님의 주장이 위 셋과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오직은혜님이 이 문제에 대해 관찰방에서 질문하자 '지방교회측의 아버지가 예수 안에 계시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라고 슬쩍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지방교회측이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까? 또한 님의 이단사상인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는 말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 점들을 위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에서 상세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2) 성경본문 자체가 소위 정통 삼위일체 교리와 충돌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저는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며 신구약 66권이 다 무오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외견상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자기 생각을 따라 함부로 불신하거나 무리하게 체계화 하려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을 포함한 지방교회 모든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경본문 자체가 '아버지=아들', '아들=성령'이라고 말함으로 외견상 삼위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본문 자체를 불신하거나 함부로 왜곡시켜 해석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이제 이인규님께 질문 드립니다.
1) 이사야 9:6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은 누구이며 '영존 하시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2) 고전15:45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살려주는 영)이 되셨나니'에서 마지막 아담은 누구(몇 격)이며, 생명 주는 영은 누구(몇 격)입니까? 그리고 '되었나니'는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3) 고후3:17의 '주는 영이시니'에서 앞의 '주'는 누구이며 뒤의 '영이시니'는 누구입니까?
4) 계5:6 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어린양이 섰는데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누구이며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일곱 영은 누구입니까?
위 질문들 각각에 대해 이인규님의 해석관점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고전15:45의 '생명 주는 영'(완결된 영)에 대한 이해 부족
이인규님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한 고전15:45에서 '생명 주는 영'이 아래 넷 중 무엇이라고 해석하십니까? 생명 주는 영은,
1)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2) 1격과 2격은 제외된 3격 성령 하나님(보혜사 성령)이시다.
3) 1격과 2격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 내재하시는 3격 성령님이시되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은 인성은 절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4) 생명 주는 영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고 상호 내재하시는 아들 하나님(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다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 예수님의 영화롭게 된 인성(육신) 즉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복합적인 영이시다.
만일 위 네 가지 사항들에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시면 그것을 말씀해 주셔도 되겠습니다. 단 님의 주장을 다른 사람 누가 지지하는지를 밝혀 주시지요.
이상의 세 가지 기준들에 대한 쌍방의 이견들이 풀리면 이인규님이 지난 글에서 이것저것 문제점이라고 갖다가 제시한 내용들은 다 풀려나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4. 그 외에 몇 가지 항목들에 대한 해명과 반박
1) 예수님이 피조물?
이인규님은 지금 균형 잡힌 읽기 능력을 상실한 분 같습니다. 지방교회는 '예수님이 피조물만'이시다 라고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인규님! 본문 문맥을 무시하고 일부를 인용하여 왜곡시키는 일을 이제 그만 하시지요. 이인규 님이 우리가 예수님을 피조물(만)이라고 한다며 인용하셨던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같은 페이지(67쪽)를 저도 인용해 보겠습니다. 잘 보시지요. 여기에 이인규님의 왜곡처럼 예수님이 피조물 만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시다. 그러나 피조된 혈육을 가진 사람으로서(히2:14) 그분은 창조의 부분이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피조물이 아니라 단지 창조자이심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와 피조물 둘 다이심을 계시하는데,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시지만 사람으로서 그분은 피조물이시다. 그분이 (사람으로서) 피조물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사람의 육신과 뼈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사람이 되셨음을 믿지 않는 것은 이단적이다'(그리스도 67쪽).
다시 묻습니다. 이인규님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시다'라고 가장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이라고 정죄하시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은 우리의 육신처럼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시렵니까(히2:14)? 그렇다면 이인규님은 치우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믿지 않는 이단으로 정죄 받을 수 있습니다.
토론은 상식과 성경근거를 토대로 해야 합니다. 이인규님처럼 자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상대방의 말들을 억지로 집어 넣으려는 식으로 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동기가 불순한 것입니다. 이인규님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간의 부분은 죽었지만 그분의 신성한 부분은 영원히 산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도 이상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이런 당연한 말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이단교리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제가 되 묻습니다. 그렇다면 이인규님 생각에는 하나님도 죽습니까? 예수님의 인간 부분은 안 죽습니까?
2) 인격이란 말이 성경에 없다는 말에 대한 왜곡
이인규님은 '인격'(페르소나)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는 말을 가지고, 마치 지방교회측이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웬일인지 이인규님이나 최삼경 목사는 한결같이 인격이란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격'이란 말의 한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곧 삼위의 구별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것같습니다. 차제에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지방교회측은 삼위의 영원한 구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인규님처럼 그 셋을 '인격'이라는 단어로만 표현해야 하는 것처럼 고집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득이하게 인격이란 말을 삼위에 대해 쓸 때에도 반드시 제한을 두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삼위는 인격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전달하는 의미처럼 "분리된 세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여 인격(페르소나)이란 말을 사용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신학자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한 분의 의견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에'에 대한 주석... 28) 한국교회와 일본 교회는 Trinity를 삼위일체로 부른다. 그렇게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매우 모호하고 부적당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위'의 개념이나 '체'의 개념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학적 연구가 요청된다... 한국어로 persona 를 인격으로 번역하면 그 말의 뜻에서 너무나도 크게 벗어난 뜻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위' 또는 '위격'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 말들도 정확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언제든지 어려움을 당하는 말이 바로 '페르소나'라는 말이다'(이종성, 삼위일체론, 300, 297쪽).
3) 예수님의 신성인 영과 사람으로서의 영을 혼동하고 왜곡시킴
이인규님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 제목 아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부탁하였던 프뉴마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고는 얼마나 성미가 급하신지 바로 그 뒤에서 이인규님 자신이 지방교회 입장이 되어 스스로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지방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의 영(프뉴마)이 신성이 되는데, 곧 그것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지방교회는 주장합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나님께 부탁한 그 "영"(프뉴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됩니다'
이인규님이 아주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인규님의 지방교회는 성부고난설을 주장한다는 거짓말은 그 뿌리가 이인규님이 본문에서 소문자 spirit로 쓰여진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대문자인 Spirit으로 착각한데 있었음이 위 질문으로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위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음이 없으십니다. 위 프뉴마는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 말을 부인하시렵니까? 증거를 제시하지요. 위 인용문의 영어성경(KJV)은 'Father, into thy hands I commend my spirit'입니다. 영어성경에서 대문자 S는 성령(하나님)에 소문자 s는 사람의 영에 각각 구분하여 쓰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만일 이인규님 주장처럼 위 영이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해석해 보면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집니다. 즉 이 경우 '하나님도 죽으신다'는 새로운 이단설이 이인규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겐 죽음이 없습니다. 다만 영원히 사시는 분으로서 죽음을 통과할 뿐입니다.
위에서 본 터무니없는 왜곡은 이인규님의 지금까지 혼자 생각에 의한 거짓된 정죄들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일일이 다 반박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인규님은 자신이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나님께 부탁한 그 "영'(프뉴마)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됩니다'라고 스스로 이단적으로 말해 놓고도 나중에 가서는 지방교회측이 그렇게 말했다고 충분히 우기실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면 자신이 토론해 본 지방교회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한다는 등의 말로 자기 고집을 절대로 꺽지 않으실 분이십니다. 상식이 통하는 토론이 아쉽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이 모든 말들이 덮여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글이 일정 부분 쓰임받을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