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자격인가, 양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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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자격인가, 양자인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간격을 절대적으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어떤 신학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직 법적인 입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포도나무와 가지 관계에서 볼수있는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요15:5)을 사실상 부인하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골3:4, 요일5:11-12)을 사람 밖에만 머물러 계시게 하는 신학일 뿐입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 논문의 저자는 ‘휘오데시아’라는 성경 용어가 잘못 번역되고 그 결과 원문의 성경적인 의미가 크게 오해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공식 번역이 아닙니다. 따라서 혹시 번역 용어나 문맥에 의문이 있는 분들은 원 출처 (확증과 비평지, 2000년 10월호 http://www.affcrit.com/pdfs/2000/04/00_04_gl.pdf)를 직접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에서 삼일 하나님과 거듭난 믿는 이들 간의 관계의 본질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는 이들이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실재들을 체험하는데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관계의 원론적인 특징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상에 있습니다(롬8:14, 갈3:26).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상을 일반적으로 받아 들이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명확성의 부족은 신약에 있는 휘오데시아 라는 단어의 번역에서 일부 유래합니다..
‘휘오데시아’라는 단어(문자적으로, 어떤 이를 아들로 세움)는 신약에 다섯 번 나옵니다 (롬8:15, 23, 9:4, 갈4:5, 엡1:5). 다수의 영어 번역본은 이것을 양자 (adoption as sons)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이 유감스러운 이유는양자 (adoption)라는 말은 대부분의 영어권 독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법적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번역은 대안으로 그것을 영어에서 아들의 지위를 가진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아들의 자격(sonship)으로 번역합니다.[1] ‘휘오데시아’를 아들의 자격으로 번역하는 것은 비록 휘오데시아 에 담긴 ‘한 과정’(a process)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반영 하지는 못하나, 아들이 되는 영속적인 지위라는 의미를 전달함으로 더 났습니다. 이 논문은 ‘휘오데시아’ 라는 단어의 의미와 용법 그리고 이런 일이 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신성하고 유기적인 한 과정 통해서 생기는지를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휘오데시아’라는 말의 의미와 용법
‘휘오데시아’ 라는 말은 아들을 의미하는 ‘휘오’라는 명사와 ‘두다'라는 의미의 동사인 ‘티떼뮈’로부터 파생된 ‘떼쉬아’라는 두 부분으로 이뤄진 복합어입니다. 그러므로 ‘휘오데시아’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을 아들로 세우다 혹은 어떤 사람을 아들의 위치에 두다 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번역가들과 사전 편찬자들은 ‘휘오데시아’ 를 정의할 때 인간적인 상황을 고려하게 되고, 그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양자는 어떤 이를 아들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단어를 “양자”(adoption)로 번역하고 또 정의합니다.[2] 영어에서 ‘아들의 자격’(sonship)은 아들의 지위를 소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이런(Byrne)이 지적한 것처럼, 이 단어는 “영속적인 지위라는 인상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양자”라는 말보다 더 좋습니다(293). 아들의 자격이 비록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나, 헬라어 의미에 근접하고 특히 성경의 계시라는 빛 안에서 볼 때 양자보다 더 낫습니다.
휘오데시아 는 신약 성경 이전에는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 않았으며[3], 그러기에 그 단어는 초기 교회를 위하여 더 큰 의미로 다가 옵니다. 로마서 8:15, 23, 9:4, 갈라디아서 4:5, 에베소서 1:5를 함께 두고 보면, 휘오데시아가 미리 정하심(예정)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몸의 구속으로 끝나는 한 과정을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법적인 절차
어린 아이들이 존재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방법은 출생을 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출생 했으면, 사람은 한 가족 안에 한 아들로 세워지거나 또는 아들의 위치 안에 넣어질 수 있을 뿐이고, 양자라는 법적 절차를 통해 낳아진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 이전에 나온 문학 작품 속에서 양자가 언급될 때, 그리고 대부분의 묘비명들에서 ‘휘오데시아’는 실제적인 양자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이미 태어난 한 아들인 어떤 사람을 다른 어떤 사람의 아들로 만드는 법적인 절차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믿는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라는 말에 직면할 때, 그들은 이런 일도 양자라는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휘오데시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구약 안에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념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몇몇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간주됩니다(출4:22, 신14:1, 32:19, 사63:16). 이에 더해 종말론적이고 예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웠고(호1:10),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웠습니다(삼하7:14, 시2:7, 89:26-27참조). 헬라어 비문들과 인간 사회의 입양 절차 속에 나오는 휘오데시아의 용법에 근거하여, 제임스 스코트 (James Scott)같은 저자들은 이러한 구약의 참고 구절들 특히 출애굽기4:22, 사무엘 하 7:14를 신성한 양자됨의 사례들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하7:1를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라고 한 시편2:7과 함께 고려할 때, 이 말씀은 분명히 신성한 양자됨 (adoption) 이라기 보다는 신성한 출생(begetting)의 약속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일부는 이것을 근동 지역 문화로부터 차용된 대관예식으로 간주하나, 신약의 저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 구절들은 그분의 창조 (행17:28-29참조)와 이스라엘의 선택 안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심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스라엘 혹은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장래 어떤 시점에 그렇게 말해질)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구절들은 신약에서 성취될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대한 약속들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입니다(롬9:26, 고후6:18, 히1:5, 계21:7). 따라서 이러한 구약의 인용 구절들은 신성한 입양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창조 안에서 이스라엘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리고 많은 아들들이 그분의 생명과 본성 안에서 몫 (sharing)을 갖게 하시려는 그분의 열망을 반향한다고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것은 독생자께서 육체되심 (성육신) 이후에야 성취될 수 있었는데, 그분은 인간생활과 죽음을 통과하신 후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부활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믿는 이들을 거듭나게 하고 많은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법적인 입양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롬8:19)인 믿는 이들의 완전히 자람과 성숙 안에서 완결되는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생겨납니다.
유기적인 과정
믿는 이들을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는 ‘아들의 자격’이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은,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휘오데시아 ‘ 가 언급된 다섯 사례들을 함께 놓고 보면, ‘휘오데시아’가 하나의 과정임이 분명해 집니다. 이 과정은 믿는 이들을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예정한 에베소서 1장 5절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9장 4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구약에서 이 아들의 자격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독특한 특권 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따르면, 신약에서 이 아들의 자격은 구속된 믿는 이들이 받는 것이며, 이것은 로마서 8장 15절이 말하는 아들의 자격의 영을 영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끝으로 로마서 8장 23절에서 믿는 이들은 아들의 자격, 곧 명백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의 완결이며 성숙(maturation)인 그들의 몸의 구속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브렌든 바이런(Brendan Byrne)은 로마서 8장에서 ‘휘오데시아’의 현재와 장래의 방면들 사이에 긴장이 존재함을 지적합니다(만일 ‘휘오데시아’를 양자로 본다면). 이것은 “현재는 그영에 의해 증명되는(15-16절) 참되지만 감취어 있는 ‘휘오데시아’ 의 지위 그리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맏아들의 신체적인(bodily) 부활 (29절, 빌3:20 참조)을 공유하게 될 그 때에 있게 될 이 지위에 대한 공식적인 계시”(293)라는 이해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어휘는 출생, 성장, 성숙이라는 인간 생명의 각 단계들 안에서 갖는 자연스러운 과정 속의 사람을 묘사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믿는 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 단계에 있는 믿는 이들은 새로 태어난 갓난 아기 (부랩호스 (1025)-벧전 2:2, 고전 14:20참조)로 언급되고, 유아(네피오스(3516)- 고전 3:1, 히5:13), 하나님의 자녀들(테크논 (5043)-요1:12, 롬8:16-17), 하나님의 아들들 ( 휘오스(5207) -롬8:14, 갈3:26, 4:6-7, 히12:7),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제들(롬8:29, 히2:12, 요20:17), 하나님의 상속자들 (롬8:17, 갈4:7)로 이어집니다. 신약 성경에 있는 많은 구절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그분의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셔서(imparts) 그들을 새 창조이자 (고후5:17, 갈6:15), 참으로 그분의 진짜 자녀들((very children) (요1:12참조)로 만드심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날 수 있으며(아나겐나오(313), 벧전1:3, 23, 팔링게네시아(3824) 딛 3:5), 다시 태어남 또는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고 (겐나오(1080) 아노덴(509) 요3:3), 물과 그 영으로 날 수 있습니다(5-6절).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출생에 의해 진짜로(genuinely) 아들을 낳으십니다(begets)(요1:13, 요일2:29, 3:9, 4:7, 5:1, 4, 18). 믿는 이들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조에(2222) 요3:16, 요일5:12-13)을 영접하며 신성한 본성(휘시스(5449), 벧후1:4)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라심으로 자라서(골2:19, 벧전2:2, 엡4:15-16참조) 완전한 성장 혹은 성숙(텔레이오스(5046)-골1:28, 4:12, 히5:14, 고전 14:20)에 도달합니다.
‘휘오데시아’ 용법과 믿는 이들의 체험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단어들은 ‘아들의 자격’이 법적인 절차라기 보다는 유기적인 한 과정임을 분명히 가리킵니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암시하고 주석가들이 힘을 실어줌으로써 믿는 이들이 단지 법적 절차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재 창조(re-create)를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우리를 생명과 본성 안에서 그분의 아들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약성경 안에 있는 단어의 용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논문 저자: 로저 굳(Roger Good)
Works Cited
Byrne, Brendan. Rev. of “Adoption as sons of God?an Exegetical Investigation into the Background of YΙΟΘEΣΙA in the Pauline Corpus.” Ed. James M. Scot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44 (April 1993): 228-294
Scott, James M., ed. “Adoption as Sons of God?an Exegetical Investigation into the Background of YΙΟΘEΣΙA in the Pauline Corpus.”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2.48 (1992): xv+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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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서, 버클리 역본(the Berkeley version )에 있는 다섯 구절 모두와 NIV, RSV와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에 있는 로마서 8장 15절.
[2] 라틴어 ad-opto 에서 파생된 adopt 는 “우연히 하나를 취하다, (아이의 위치에 있는) 하나를 취함”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어근의 의미에 있어서 라틴어는사실상 헬라어에 매우 근접해 있다. 그러나 adoption 이라는 단어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개념은 법적인 절차라는 의미이다.
[3] 신약성경 이전의 용례에서, 그것은 대부분 B.C. 2세기까지의 비문들 안에서 발견된다. 이들 비문들에서 그 단어는 양자되는 법적인 절차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곤 했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이 아들의 위치 안으로 세워지거나 혹은 넣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