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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한 김홍기 목사의 지방교회 양태론 정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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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한 김홍기 목사의 지방교회 양태론 정죄

 

 

김홍기 목사는 평소보다 길게 쓴 자신의 다섯 번째 글 제목을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지방 교회의 양태론”이라고 달았다. 그런데 위험하다는 그 “지방 교회 양태론”은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꾼들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즉 김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실제로 믿고 있는 성경적인 삼위일체론과는 전혀 무관한 ‘허상’(허수아비)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그냥 두면 매우 위험하다며 말로 또 글로 ‘때리고’ 있다. 이것은 선량한 독자들에 대한 기만에 해당될 수 있다. 김 목사도 인정한 “CRI 대표 행크 해네그래프와 편집장 엘리옷 밀러같이 오랜 훈련을 거친 미국의 이단연구가들”도 예전에 잘 몰랐을 때는 지금의 김 목사처럼 반응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6년간의 재연구를 통해 지방 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을 참되게 알고 난 후에는, 자신들의 신앙 양심을 따라 “지방 교회 양태론을 정통으로 분류하고, 지방 교회측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지방 교회측은 김 목사가 ‘양태론’으로 오해하는 부분인 ‘위격 간의 경륜적인 동일시’, ‘한 신격’ 등에 대해 이미 상세하게 반박 또는 해명했고, 관련 문서들을 김 목사에게도 우편으로 다 보내 주었다. 또한 그 모든 자료들은 인터넷에 올려져 있어서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김 목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responses/index.html). 그럼에도 왜 김 목사는 지금처럼 자신의 글 제목과 직접 관련도 없는 삼위일체의 ‘위격’(位格, Person)을 장황하게 다루고, 글 말미에서 약간의 지면으로 과거의 양태론 정죄를 재탕하는 식의 비생산적인 토론을 고집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김 목사가 양태론에 관한 지방 교회측의 바른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자신도 CRI처럼 자신의 오해를 인정해야 하는 점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의 해명글은 건성으로 읽고 어찌하든 꼬투리 잡을 내용만 찾아내어 비판하는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을 계속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진리토론 자세가 아니다.


김 목사는 이번 토론이 주님의 몸을 위하고 한국에 있는 교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CRI와 풀러 신학교측이 지방 교회측을 연구할 때처럼, 1)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대상으로 2) 실체적 진실(fact)만으로 3) 공정한 잣대로 판단하도록 김 목사에게 태도와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김 목사에게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미 수차례 이뤄졌던 해명 혹은 반론 내용들을 이곳에 거듭 소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의 글 구성은 1) 성경적인 삼위일체 소개, 2)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의 문제점 지적, 3) 지방 교회측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김 목사가 지적한 항목들에 대한 해명 혹은 반박, 4) 결론의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최대한 김홍기 목사의 글의 순서를 따라가며 반론하고자 한다.

 


1. 성경적이고 균형잡힌 삼위일체론 요약


삼위일체는 비밀하신 하나님(사45:15)에 대한 교리이다. 따라서 그것을 불충분한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대로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믿는 이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9가지 항목들을 신앙으로 고백하거나 동의해 왔다. 지방 교회측 역시 그러하다.


1)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One God)이심(시86:10, 사45:5, 고전8:4). 2) 유일하신 하나님은 셋-하나(Triune),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심(마28:19). 3) 삼위는 동일한 본성을 공유하심(요4:24). 4) 영원히 동시존재하심(요14:16-17, 엡3:14-17, 고후13:14). 5) 영원히 상호내재하심(요14:10-11, 26, 15:26). 6)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 않으심. 7)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본질적 삼위일체 방면(마28:19, 요14:10-11). 8)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위한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계1:4-5, 엡1:4-5, 7, 13, 마3:16-17). 9) 신격 안의 셋(아버지, 아들, 영) 모두가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심(엡4:6, 요14:20, 골1:27, 고후13:5, 요14:17).


지금까지의 토론 내용을 볼 때, 김홍기 목사는 위에서 언급한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의 주요 항목들 중에서 다섯 가지 항목들(1번, 5번, 6번, 8번, 9번) 방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다보니 김 목사는 자신이 소개한 정통 신조들과  웨인 그루뎀, 노먼 가이슬러가 제시한 원칙들에 의해서도 정죄되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 이 점은 차례로 다시 다룰 것이다.

 


2.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은 정통 신조들과도 상충된다.


아마도 김 목사는 독자들에게 위트니스 리가 정통 신조들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덤으로 자신의 잠재적 삼신론 혐의도 벗어날 복안으로 신조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위트니스 리가 “신조들은 삼신론적인 것을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삼신론을 함축하고 있다라고 한 말을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이런 사실로 보건대, 리는 실제로는 ‘삼위’의 하나님을 표방하는 니케아 신조뿐 아니라 아타나시우스 신조 및 다른 모든 정통 신조들과 가르침들을 함축적 혹은 잠재적 삼신론이 아닌 삼신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거짓되게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위트니스 리가 김 목사의 주장처럼 실제로 고대 신조들을 삼신론 이단으로 규정하여 배척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조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비록 사도들의 신조가 단순한 방식으로 쓰였지만 그것은 교부들이 심도있고 철저하게 연구를 하고 말씀을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 니케아 신조에 이단적인 것이 전혀 없고, 실제로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그 내용들에 있어서는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아직 정본(正本)으로 공인받지 못한 일곱 권의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한국복음서원, 2001, 61-63쪽).


개정된 니케아 신조가 그 내용들에 있어서 심지어 이전의 니케아 신조보다 더 풍성하고 역시 어떤 오류나 이단을 담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신약의 일곱 권의 책들이 아직 공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완전하다(65쪽). (칼케돈 신조 안의) ‘하나님의 모친’에 관한 이단을 제외하면 신조들 안에는 다른 심각한 오류들이 없다. 사실상 신조들 속의 많은 항목들이 아주 정확하다(73쪽).


위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는 결코 신조들에 대해서 삼신론 이단이라고 말한 적이 없고, 오히려 “신조에 이단적인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자신의 억지 논리를 근거로 거짓되게 다른 동료 믿는 이들을 정죄하고 있다.


사실 위트니스 리가 고대 신조가 진리의 핵심적인 방면을 담았지만,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모든 방면을 다 포함하지 않은 점에서 ‘불충분하다’라고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또한 사도 신조나 니케아 신조가 삼위의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이심을 명시하되, 아타나시우스 신조처럼 “그렇지만 세 하나님들이 계시지 않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한 하나님이심’(신6:4)을 분명히 명시하지 않은 부분을 가리켜 “삼신론을 함축한다”라고 표현한 것도 객관적인 평가일 뿐이다.


참고로 필립 샤프는 “신조는 성경과 동등한 것이 못되고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 무오한 규범인 성경에 항상 종속된다. 신조의 가치는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말했다(필립 샤프, 박일민 편역, 신조학, 11쪽). 따라서 어떤 신조도 절대기준인 성경을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며, 위트니스 리는 그러한 관점에서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우리는 장로교 통합교단의 대 신학자였던 이종성 박사도 동일한 이유로 “사도 신조가 삼신론 구조”라고 말했던 사실을 앞의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럼에도 김 목사가 이종성 박사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없는 말까지 지어내어 위트니스 리만 이단 운운한 것은 공정한 자세가 아니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아래와 같이 고대 신조들의 종속론 여지를 지적한 필립 샤프 그리고 그의 책을 편역 소개한 칼빈 신학교의 박일민 박사도 이단인가?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가르치는 간접적인 방법만을 사용함으로써, 성자의 성부에 대한 종속과 성령의 성부와 성자에 대한 종속 개념을 허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필립 샤프, 박일민 편역, 신조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34쪽).


참고로 지방 교회측 성도들은 모든 참된 동료 믿는 이들과 함께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명시하는 삼위일체론 관련 모든 진술들을 우리의 신앙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점을 밝혀 둔다.


오히려 각 위격이 완전한 하나님(fully God)이심을 강조하되, 그 세 위격들이 여전히 한 하나님이 되시는 안전 장치인 ‘상호내재’(요14:10-11) 개념을 반복적으로 거부한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 사상이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정면 위배되고 있다. 그 결과 김홍기 목사는 웨인 그루뎀이 경고했던, 삼신론을 견지한 바로 그 복음주의자들 중 한명이 되고 말았다.

 


3.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은 웨인 그루뎀과 노먼 가이슬러의 명제들과도 상충된다.


김 목사는 웨인 그루뎀과 노먼 가이슬러가 정리한 아래 내용이 “정통 삼위일체 교리”라고 소개했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둘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이상 웨인 그루뎀) “(1) 하나의,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 (2) 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이상 노먼 가이슬러).


이어서 김 목사는 “어떤 사람이 가이슬러의 첫째 명제(‘하나의,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를 부정하고, 둘째 명제(‘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만을 주장한다면 그는 삼신론(tritheism)을 옹호하는 자가 된다. 물론 이것은 비성경적인 이단 사상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볼 때는 김홍기 목사 본인 자신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김 목사는 본질이 동일한 각기 완전한 하나님이신 세 위격을 말하되, 그 세 위격들이 ‘상호내재 하심’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김 목사는 “성부와 성령 하나님은 배제된 ‘완전한’ 하나님인 성자만 성육신하셨다”라는 모순된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1/3 하나님이실 뿐 웨인 그루뎀이 말한 ‘완전한’ 하나님(fully God)이 결코 아니시다.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시86:10, 사45:5, 6, 21, 슥14:9, 말2:10, 고전8:4,6, 롬3:30, 딤전2:5, 갈3:20, 약2:19)과 어거스틴, A. H. 스트롱, 로레인 뵈트너 같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 그리고 김 목사가 소개한 위 웨인 그루뎀과 노먼 가이슬러가 공통적으로 말한 “하나님은 한분이시다(There is One God)”라는 명제에도 저촉된다. 이 점은 다음 항목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4.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의 실상과 그 치명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한분이심을 토대로 세 위격들을 말한 어거스틴과 달리,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께서 세 위격이심을 전제로 여전히 하나님께서 한분이심을 증명해야 함으로써 종종 삼신론 시비에 휘말렸다(이점은 현재 김홍기 목사도 같은 처지이다). 즉 그들은 아리우스(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오직 성부만 참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 앞에 성자와 성령께서도 성부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데 주력하다보니, 그렇다면 “참 하나님이 둘 혹은 셋인가?"라는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상호내주, 상호침투) 이론이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14:10-11)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써, 삼위의 ‘구별’과 ‘분리 불가’를 한꺼번에 증명할 수 있는 원칙이다. 따라서 각기 다른 세 위격을 믿되, 그분들이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여전히 ‘한 하나님’(one God)이시려면 삼위께서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하심을 반드시 함께 언급해야 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어이없게도 이러한 정통 삼위일체를 담보하는 핵심 안전장치에 해당되는 상호내재 개념(요14:11)을 “지방 교회측의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폄하하고 거듭 거부해 왔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김홍기 목사를 잠재적 삼신론 신앙의 소유자로 보는 주된 이유이다.


잠재적 삼신론자인 김 목사와 달리,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한결같이 ‘페리코레시스’를 삼신론 이단에 빠지지 않는 안전장치로 강조하여 말한다. 먼저 장신대 총장인 김명용 박사도 “세 하나님”이 하나됨을 유지하는 수단이 ‘페리코레시스’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7)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세 하나님은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 이 상호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요14:7-11 참고)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김명용, 교회와 신앙, 2001년 10월호).


예장 통합교단 기관지인 기독공보에 게재된 남정우 러시아 선교사도 다음과 같이  ‘페리코레시스’가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말한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일체'보다는 '삼위'를 좀 더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데, 사실은 모두를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통해서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8세기 다마스커스(Damascus)의 요한이 사용한 이후 동서 교회 양쪽에 걸쳐 삼위 하나님의 일체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De Fide Orthodoxa).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각 기관을 순환하듯이, 상호침투를 통한 내주와 순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여호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은 이 영원한 신적인 삶의 순환(페리코레시스) 때문이다(남정우 러시아 선교사, 기독공보, 2002.07.06, 2373호).


칼빈 대학교 김석환 박사도 “캅바도키아 교부들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삼신론을 비롯한 이단들의 교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리된 이론 체계로서 후대에 그렇게 표현되었다.”라고 말한다(교부들의 삼위일체, 249-250쪽). 또한 그는 ”‘페리코레시스’ 이론이 ‘전체 신격의 존재(being)가 세 위격들의 각각의 실재 안에 포함되어 있다’라는 관념에 대한 설득력있는 공식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52쪽).


사실이 이러함에도 김홍기 목사는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상호침투) 개념을 부인하다 못해 심지어 ‘이단 사상’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김홍기 목사가 삼위의 각각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그들의 상호내주는 극구 부인함으로써 사실상 자신이 삼신론자임을 한국 교계 앞에 공개적으로 자백하고 있다고 평가할 것이다. 이것은 김 목사의 상호내재 개념에 대한 무지가 불러 온 참사이다.

 


5.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은 정통 신학자인 어거스틴 등의 삼위일체론과도 다르다.


역대로 삼위일체 교리는 시간을 두고 발전 보완되어 왔다. 그 중에서 어거스틴의 역할과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종성 박사는 자신의 <삼위일체론>(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 어거스틴을 “삼위일체론 논구의 최종 주자요 완주자”라고 소개했다(263쪽). 필립 샤프도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제4차 에큐메니칼회의의 때까지(325-451)의 교리적 결정들과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매우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요약하고 있다.”(필립 샤프, 박일민 편역, 신조학, 34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김홍기 목사와 어거스틴 그리고 A. H. 스트롱, 로레인 뵈트너 등의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 중 한 위격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즉 위 어거스틴 등은 삼위의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를 인정함으로 어느 한 위격은 그 특정 위격임과 동시에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라고 보는 반면, 김 목사는 그것을 부인하고 성육신하신 분은 성부와 성령이 배제된 제2격 성자만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삼위 각각을 분리시켜 1/3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김 목사가 ‘페리코레시스’ 이론을 부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김 목사의 바로 이런 점이 웨인 그루뎀이 정통 삼위일체론이 되기 위해 제시한 두 번째 조건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에 저촉된다. 따라서 아래와 같은 고백이 정통 삼위일체론이다.


(어거스틴) “최고의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하나가 셋을 합한 것 만하며, 둘을 합해도 하나보다 더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자체가 무한하시다. 그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and all in each).”(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99쪽, 어거스틴,  On the Trinity(VI), p.103).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A. H. 스트롱, Systematic Theology, p.p.332-333).


“주기도문에서 … ‘아버지’라는 단어는 … 배타적으로 첫째 위격만 아니라, 한 하나님인 세 위격들을 가리킨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 107).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이다.”(George Bull 성공회 주교, 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한국복음서원, 288쪽).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 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김홍기 목사는 결코 어거스틴이 위에서 고백한 것처럼 “삼위의 모든 위격들이 한 위격 안에 계신다”라고 고백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통 칼빈주의자인 로레인 뵈트너처럼, 주기도문에서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단지 성부(1격)만이 아니라 ‘세 위격들’ 전체"라고 고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김 목사의 신론에 따르면, 삼위는 상호내주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백히 다른 두 관점들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어거스틴인가 아니면 김홍기 목사인가?

 


6. 김홍기 목사의 잠재적 삼신론과 성경 구절들을 통한 검증


성경 본문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없이 교리적으로만 정통 삼위일체를 외치는 사람들은 막상 성경 본문에 따른 삼위일체 관련 질문을 하면 매우 취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절)라고 하신 분이 삼위 중 누구이신가?"라고 질문했을 때 김 목사는 답변을 주저했다.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성경 본문들이 말씀하는 내용을 김 목사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말씀하신 분은 성부, 성자, 성령 중 어느 위격이신가?


1. “나는 주요, 아무도 다른 이가 없나니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느니라. 네가 나를 모를지라도 내가 너를 띠로 동였노라”(사45:5).


2. “너를 지으신 분이 네 남편이니 만군의 주가 그 이름이며, 너의 구속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라. 그가 ‘온 땅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54:5).


3. “이는 너희가 내가 그 인줄(I am he) 알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 죄들 가운데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그들이 주께 말하기를 “네가 누구냐?”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 온 니라”(요8:24-25).


4.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골2:9).


5.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였음이더라”(For the Spirit was not yet)(요7:39).


6.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전15:45).


7. “이제 그영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Now the Lord is that Spirit)(고후3:17).


8. “한 어린양이 섰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더라. 그(어린양의) 일곱 눈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5:6).


“삼위의 모든 위격들이 한 위격 안에 계신다.”라고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처럼 믿게 되면 위에서 지칭한 ‘너’ 혹은 ‘그’ 혹은 ‘영’ 등은 어떤 위격이 되시든 삼위 전체이심으로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김 목사처럼 삼위의 상호내재를 부인하고 성부, 성자, 성령을 엄격하게 구별(분리)하게 되면, 위 말씀에서 말한 분이 삼위 중 어느 위격이신지를 가려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위격을 뒤 바꾸게 되어 심각한 혼란과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이런 혼란은 실제로 거듭난 믿는 이들 안에 어느 위격이 내주하시는지, 그리고 기도시 어느 위격에게 기도해야 하는 지 등에서 겪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8:4-6)라는 말씀을 김홍기 목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정통 삼위일체론대로라면, “한 하나님 곧 아버지”는 성자와 성령이 포함되신 삼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함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세 위격들의 상호내재를 이단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김 목사는 "성부만 참 하나님이시다"라고 여호와 증인처럼 이해하지 않는 한 답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린양의 (일곱) 눈이 곧 하나님의 일곱 영이시다”(계5:6)라는 말씀도 마찬가지 난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김홍기 목사는 지금처럼 자신과 노먼 가이슬러만이 정통 삼위일체론의 수호자라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으로 겸손하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튼 다음 글에서 위 각각의 구절들이 삼위 중 어느 위격을 지칭하는지 반드시 밝혀주기를 바란다.

 


7. 삼위의 구별을 믿어도 ‘위격’(페르소나)이란 말을 안 쓰면 이단이 되는가?


김 목사는 자신의 다섯 번째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구별된 삼위께서 한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삼위’ 좀 더 정확히는 ‘페르소나’(person, 位)라는 단어 사용을 꺼리는 것을 문제 삼았다. 즉 그는 ‘페르소나’라는 단어 하나를 자기처럼 안 쓴다는 이유로, “지방 교회의 양태론은 지방 교회가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위장된 양태론 교리’이다. 따라서 ‘노출된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제 김 목사의 위 주장이 얼마나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말인지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우선 위트니스 리가 정통 삼위일체의 두 방면인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동일 본질을 소유하심을 성경과 정통 삼위일체론에 맞게 믿는다는 점은 김홍기 목사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김홍기) 지방 교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정통 삼위일체론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져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Witness Lee,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Chapter 1, Section 5) [진술 #1].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진술을 접할 때 누가 리와 지방 교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2) 그렇다면 왜 위트니스 리는 ‘위격’(페르소나)이라는 용어 사용을 주저하고 마지못해  사용했는가? 그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한계 때문이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니케아 신조나 사도 신조의 ‘삼신론적인 구조’(이종성 박사의 표현), 혹은 “세 하나님”(김명용 박사의 표현), 혹은 “각각 독립된 인격의 신들”(남정우 선교사의 표현)의 약점은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상호침투)에 의해 보완되고 치유됨으로 정통 삼위일체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가 달리 마땅한 용어가 없어서 전통적으로 쓰는 ‘삼위’라는 표현을 용인하지만, 그것을 '매우 만족스럽지 못해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참으로 세 분”(three persons)이라고 말한 것은 전혀 모순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을 지적한 것뿐이다.


우리는 김 목사가 이 문제는 하나님의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 자체를 부인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단지 ‘페르소나’라는 용어 사용에 관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페르소나는 “자아 의식을 가진 셋 혹은 삼중의 개인에 대한 견해는 삼신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거의 말할 수 없다”(Erickson, 231)는 이유로 칼 바르트가 ‘위격(person)’이라는 용어 사용을 회피했던 사실을 스스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르소나’라는 용어의 한계는 칼 바르트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정통 신학자들도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먼저 웨스턴 신학교의 저명한 신학 교수인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공식이 4세기에 매우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하나님은 한 실질(substance) 또는 한 본질(essence)이시며, 세 인격들(persons)로 존재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어려움은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교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점에서는 셋이시고 또 다른 점에서는 하나이심을 말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Millard Erickson, God in Three Persons: A Contemporary Interpretation of the Trinity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5), p. 19).


칼빈 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격 안에서 이러한 구별들을 말할 때, 헬라쪽 저술가들은 일반적으로는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란 용어와 가끔씩은 ‘수브스탄시아’(substantia)라는 용어를 썼지만, 라틴계 저자들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를 썼다. 전자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후자는 뜻이 모호했기 때문에, 스콜라 신학자들은 ‘숩시스탄시아’(subsistentia)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사용된 용어들이 가지각색인 것은 그 용어들이 늘 불충분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인격’이라는 말이 그 개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Louis Berkhof, 조직 신학, 4판.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39, 1941), p. 87).


달라스 신학교 창립에 기여했던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도 다음과 같이 썼다.


‘인격’이라는 용어에도 때로 이의가 제기된다.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인격이라는 용어도 부적절한 용어라는, 심지어 그 용어를 쓰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확실히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에 빠지게 된다(W. H. Griffith Thomas, The Principles of Theology (London: Church Book Room Press, 1956), p. 31).


이종성 박사도 다음과 같이 ‘페르소나’라는 용어에 대해서 말했다.


"한국어로 persona를 ‘인격’으로 번역하면 그 말의 뜻에서 너무나도 크게 벗어난 뜻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한 위(位) 내지는 위격(位格)으로 번역하기도 하나, 그 말들도 정확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언제든지 어려움을 당하는 말이 바로 ‘페르소나’라는 말이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97쪽)


존 웨슬리는 1775년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삼위일체’(Trinity)나 ‘인격’(Pers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라고 감히 강요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더 좋은 용어를 알지 못하기에 그 말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용어들을 사용하기를 꺼려한다면, 감히 누가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라고 그에게 강요할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다(존 웨슬리 전집, vols. 5 and 6, 3rd edi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872, 2002) pp. 200-201).


위 내용들은 이미 지방 교회측이 본 토론 전에 김 목사에게 우편으로 보낸 책자들 안에 다 들어 있고, 인터넷에도 이미 올려져 있는 것들이다. 위에서 보듯이 ‘동일 본질을 공유하시는 삼위’를 인정하면서도 ‘위’(位) 즉 ‘페르소나’라는 단어 사용을 꺼려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만이 아니라 밀리아드 에릭슨, 루이스 벌콥, 그리피스 토마스, 요한 웨슬리, 이종성 박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지방 교회의 열혈 옹호자인 CRI 회장 해네그래프와 편집장 밀러는 리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이런 모순을 알고 있기나 하는가?”라고 호통을 치고, “지방 교회의 양태론은 지방 교회가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위장된 양태론 교리’이다. 따라서 ‘노출된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양태론 이단 교리인 것이다.”라고 무의미한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다.

 


8. 노먼 가이슬러의 위격 개념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반론


김홍기 목사는 지방 교회측이 ‘위격’의 구별되심을 에베소서 1장에 따라 <성부는 선택과 예정>을 하신 분, <성자는 구속>을 이루신 분, <성령은 인침과 보증>이 되신 분으로 설명한 것을 ‘동문서답’으로 치부했다. 그후 김 목사는 ‘위격’ 개념을 가장 쉽고 명료하게 설명한 사람이 노먼 가이슬러라고 치켜 세우며 다음과 같이 그의 글을 인용 소개했다.


성경은 하나님이신 세 구별된 위격이 계시다고 확언한다. 모두 [삼위]는 하나님으로 불리워지시고, 모두 [삼위]는 한 위격으로서의 본질적 특징을 소유하고 계시다. … 인격체(personhood)는 전통적으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소유한 사람으로 이해된다. 이 세 가지 특징 모두가 성경에 있는 삼위일체의 세 구성원들의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격체는 하나의 “나”(an “I”) 혹은 하나의 “누구”(a “who”) 혹은 한 대상(a subject)을 나타낸다. 삼위일체의 각 “나”는 (한 공통의 본성에 따라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능력을 소유한다. 인격체 그 자체는 그것의 나됨(I-ness) 혹은 누구됨(who-ness)이다. (Geisler, 279)


지방 교회측은 이러한 가이슬러의 인격 개념에 대해 이미 상세히 반론했고 그 점을 김 목사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전혀 반론이 없었던 것처럼 한국인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반론은 여기를 보라.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responses/Geisler-Rhodes/Persons-as-test-of-orthodoxy.html


가이슬러의 위격에 대한 정의의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약점은 가이슬러가 ‘한 본질, 세 인격’을 말한 후 그런 하나님을 단수 인격 대명사인 ‘그분’(he)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수 대명사는 ‘본질’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위격들’을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하다. 만일 위격을 가리킨다면 복수가 되었어야 했다. 밀리아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가이슬러의 진술에서 분명히 드러난 잘못을 다음처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단일의 존재(a unitary being)이시다. 가끔씩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은 어느 정도 느슨하게 함께 묶여진 한 묶음의 속성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의 속성(a attribute) 또는 하나의 술어(predicate)가 아니시다. 그분은 살아있는 한 인격, 한 주어(subject)이시다(God the Father Almighty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8), p. 231).


또한 가이슬러의 ‘무엇’과 ‘누구’ 사이의 구별이 하나의 산뜻한 공식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우리에게’와 ‘우리의’라는 복수형에서 ‘그분’과 ‘그분의’라는 단수형으로 전환되지만, 그것은 항상 한 인격이 말하고 행동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9.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위격 간의 ‘기능적’ 동일시를 양태론으로 오해하는 김홍기 목사


독자들은 김 목사의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지방 교회의 양태론”이란 제목의 긴 글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 지방 교회측의 어떤 점이 그런 양태론이라는 것인지 그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자신의 글 거의 끝부분 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방 교회는 ‘삼위일체’(‘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와 ‘일위일체’(‘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를 동시에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양립될 수 없는 모순이고 무한한 혼돈이며, 이런 점에서 ‘일위일체’만을 주장하는 일반 양태론과 다르다. 일반 양태론은 ‘노출된 양태론’이기 때문에 식별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방 교회의 양태론(‘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은 아주 교묘하게 ‘위장된 양태론’이기 때문에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일반 양태론보다 지방 교회의 양태론은 훨씬 더 위험하다.”


위 말은 지방 교회측이 ‘아들이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라고 했기 때문에  양태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사야 9장 6절(한 아들 ... 그 이름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고린도후서 3장 17절(주는 영이시니)라는 성경 본문 그대로를 말한 것일 뿐 양태론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만일 이런 말이 양태론이면, 그런 성경 본문을 쓰신 하나님 자신이 먼저 양태론자로 정죄되어야 할 것이다. 김 목사는 왜 이런 참람한 일을 자처하는가!


또한 김 목사는 “지방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와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를 동시에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양립될 수 없는 모순이고 무한한 혼돈”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에서의 삼위의 구별이라는 <삼위일체의 본질적인 방면>과 ‘기능의 동일시’라는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을 말한 것일 뿐 모순도 아니고 결코 양태론도 아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1) 지방 교회측는 김 목사도 인정하듯이 삼위의 본질적인 방면에서의 ‘위격들의 구별되심’을 확고히 믿는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 사이에는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아버지는 아들과 구별되시고, 아들은 그 영과 구별되시며, 그 영은 아들 및 아버지와 구별되신다.(위트니스 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1993, 17쪽). (영문판)


2) 단지 삼위의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위격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믿을 뿐이다.


위 이사야 9장 6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들을 이뤄가시는 경륜적인 방면의 구절들이다. 케리 로비쇼우는 지방 교회측 신학 잡지인 <Affitmation & Critique> 창간호에서 위 두 구절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그 결과 그는 세 위격들은 “영원한 정체성 안에서 하나님은 구별된 세 분이시나, 경륜적인 구원하시는 행동 안에서 한 분으로 일하심으로 “주신 바 된 아들은 그분의 일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로 불리우시고 … 아들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께 참여하도록 믿는 이들에게 그분 자신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그 영이 되신다.”라고 말한다(http://www.affcrit.com/pdfs/1996/01/96_01_sc.pdf).


이처럼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위격의 구별을 유지하면서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 즉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방면에서 위격 간의 ‘동일시’는 성경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을 가리켜 “위장된 양태론”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전 합동신학대학 대학원 총장 박형용 박사도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에서 고린도후서 3장 17절 본문을 중심으로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다룬 바 있다. 즉 그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라고 했다. 이러한 견해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R. B. Gaffin의 견해이기도 하다. 해당 신학 논문의 전문을 보기 원하는 독자들은 여기를 보라. https://www.localchurch.kr/23379


그 외에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루이스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201쪽).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와 그 영 - 한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차원 또는 영역이 아니라 그 영 즉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 …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영 사이에 구별이 없다”(… 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James Dunn, 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giving Sprit, The Christ and the Spirit: Christology Vol.1, p139)도 참고하기 바란다.

 


10. ‘세 위격들’이 ‘한 신격’(데오테스) 안에 계심에 무지한 김홍기 목사의 갈팡질팡 행보


위 삼위의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기능적인 동일시>에 대한 오해 외에, 김 목사가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이라고 공격하는 또 다른 근거는 위트니스 리가 어디서는 ‘세 위격들’이 계신다라고 했다가 또 어디서는 하나님은 ‘한 위격’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임의대로 그 ‘한 인격’(사실상 이것은 골2:9의 데오테스 즉 한 신격(神格)을 가리킴)은 ‘성부=성자, 성자=성령’이라는 의미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아래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먼저  골로새서 2장 9절에 단 한번 언급된 ‘신격’(神格)(데오테스, 2320)이 로마서 1장 20절이 말하는 신성(神性)(데이오테스, 2305)과 전혀 다른 단어임을 볼 필요가 있다. 신격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라고 할 때의 '오직 하나’에 해당되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전체가 포함된 개념인 반면, 신성은 그 하나님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 신격(Godhead) 개념은 김홍기 목사를 포함하여(그는 골2:9의 데오테스를 위 ‘신성’으로 오해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 같다. 그러나 김석환 박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닛사의 그레고리와 가이샤랴의 감독이었던 바실(Basil, 330-379)의 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의 친구들이여. 삼위일체께서 한 신격(One Godhead)으로 계시다고 고백하십시오(198쪽). … 그래서 세 위격들의 구분이 신격의 한 본성과 존엄 안에서 보존될 수 있다(that the distinction of the Three Persons may be preserved in the one nature and dignity of the Godhead). … 셋이 신격 안에서 하나이고, 하나가 특성들 안에서 셋이다(The Three are One in Godhead, and the One Three in properties)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215-216쪽).


(바실) 성경은 한 신격에 대하여 언급하는 어디서나 신격을 단수로 말한다. … 내가 한 신격을 고백한다고 비난하는 이 비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위의 책, 144쪽).


따라서 이러한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조 2장 3절도 “단일하신 신격(神格) 안에 삼위(三位)가 계시는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시다”(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라고 이 세 개념을 각각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이러한 정통 신학자들과 정통 신조에 무지하다보니 아래와 같이 가이슬러의 말을 인용하며, “리의 모순된 진술들을 볼 때 우리는 혼돈의 수렁에 빠져 있는 리와 지방교회를 본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수렁에 빠진 사람’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김홍기 목사와 노먼 가이슬러이다.


CRI는 한때는 모순되는 진술들이라고 인정했던 그것들이 이제는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마음의 변화를 촉발했는가? 이 유명한 이단 변증가들(엘리옷 밀러나 그레첸 파산티노)은 “하나님은 오직 한 위격이시다”라는 진술과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이시라는 진술이 이제는 모순이 아니라고 믿고 있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상하게도, 그 답은 ‘예’인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Geisler and Rhodes, 11)


위 가이슬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라”(마28:19)라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한 인격(이름)이시다"라고 할 때는 위 ‘한 신격’을 가리킨 것이고, "하나님이 구별된 세 위격이시다"라고 진술할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즉 위트니스 리가 말한 ‘한 인격’(한 신격)은 삼위 중 어느 한 인격이라는 말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다 포함된 ‘삼위 전체’(신성한 존재의 총체)를 가리킨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인 진술이며, 모순이나 혼동이 결코 아니다.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분리된 세 인격들 또는 세 신들이 아니시다. 그분들은 한 하나님, 한 실재, 한 인격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인격을 가리키고, 인격은 그 이름의 실재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며 …(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에게 생명되신 삼일 하나님 (Anaheim, CA: Living Stream Ministry, 1996), p. 48).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말한 사람은 위트니스 리 만이 아니다. 아래에서 보듯이 정통 신학자로 평가받는 로이드 존스, 반 틸도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참된 의미의 경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또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확신감을 갖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Martyn Lloyd-Jones, .Great Doctrines of the Bible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3), pp. 55-56).


우리는 하나님 즉, 신격 전체가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 라고 단언한다. … 다른 모든 존재, 곧 모든 피조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하나의 숫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을 현시함을 신앙으로 간직해야만 한다(Cornelius Van Til ,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61), p. 229).


노먼 가이슬러는 위 반 틸의 말에 대하여 “반 틸이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주장하는 것은 삼중 인격적인 존재인 신격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거나,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한 분(as on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와 세 분(as three)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때가 정확히 똑같은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이슬러(김홍기 목사)의 ‘한 인격’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는 단지 반 틸에게만 아니라 정확히 동일한 개념을 말하는 위트니스 리와 로이드 존스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공정하다. 만일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한 신격을 "세 위격들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억지를 쓰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일반 양태론보다 더 위험한 지방 교회의 양태론”이라고 하고, “정통 삼위일체론으로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위장된 양태론 교리”라고 하는 것은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불의한 재판관 흉내이며 공허한 ‘허수아비 때리기’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김홍기 목사는 삼위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주장하되 그 세 위격의 상호내주를 이단사상이라고 거부함으로써 세 하나님들 신봉자라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오히려 지방 교회측을 향해 양태론이라고 공격한 것은 ‘한 신격’(골2:9),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기능적인 동일시’(사9:6, 고후3:17)에 무지한 결과 때문이고 실체가 없는 허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또한 김홍기 목사가 성경에도 없고 정통 신학자들도 주저하는 용어인 ‘페르소나’ 사용 여부를 절대 기준으로 삼아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측을 부당하게 비판했음이 밝혀졌다. 우리는 김홍기 목사가 앞뒤가 맞지 않는 현재와 같은 억지주장을 버리고 주님 앞에서 합당한 종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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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6.03.01. 04:17
"김홍기 목사는 결코 어거스틴이 위에서 고백한 것처럼 “삼위의 모든 위격들이 한 위격 안에 계신다”라고 고백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통 칼빈주의자인 로레인 뵈트너처럼, 주기도문에서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단지 성부(1격)만이 아니라 ‘세 위격들’ 전체"라고 고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김 목사의 신론에 따르면, 삼위는 상호내주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백히 다른 두 관점들 중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어거스틴인가 아니면 김홍기 목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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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예루살렘 2016.03.01. 04:22

실제로는 비성경적인 삼위일체론 보유자이면서 마치 자신이 정통 삼위일체론 수호자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단지 성부(1격)만이 아니라 ‘세 위격들’ 전체"라고 결코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미 정통 신학자이자 정통 칼빈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을 대놓고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곤란한 이슈는 슬쩍 무시하고 넘어가버리곤 합니다.

삼위일체론처럼 복잡한 주제는 자세히 들어갈수록 누구 말이 맞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 손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은...위와 같은 고백을 할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입니다. 김홍기 목사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토론 기간 내내 발목에 족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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