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건 제하여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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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성장은 빛의 문제이며 빛비춤이 있을 때 그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있었고 그 후에 생명이 산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빛비춤에 있어서 넷째 날은 하나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생명이었다면 넷째 날의 빛비춤 이후에는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의 생명인. 만일 우리에게 생명의 성장이 둔화되어 있고 심지어 멈추어버린 상태라면 이제 이러한 전환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강한 빛 비추심에 의해…
1. 내 수건 제하여 주의 빛 보게 해
속임 당치 않고 참 알게 하소서
첫째 날의 빛이 비추었을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주님을 우리의 생명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창 1:3, 고후 4:6).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죄인임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그러나 그 빛은 우리의 존재, 우리 자신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빛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그분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고 그분을 대표하기에는…
후) 주여 당신의 참 빛 생명의 이 빛이
날 비춰 나의 전체 다 밝혀 주소서
어쩌면 주님의 은혜는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기에 우리를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탄은 교통의 능력이 있으며 우리 안에 어떤 생각을 넣어 줄 수가 있는데 그 생각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마 16:23, 요 13:2). 주님의 은혜가 없을 때 사탄의 제의는 너무도 달콤하고 우리는 그가 넣어 준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2. 내 자신에 대해 난 알지 못했네
교만에 속아서 늘 자만하였네
사탄이 우리 안에서 어떤 부분을 ‘가질 때’ 주님의 은혜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요 14:30). 과거의 은혜와 과거의 성취와 과거의 영광들로 인해… 그러다가 어느 날 주님의 긍휼로 빛이 비췰 때 자신이 ‘어떤 생각’을 품었음을 보게 되고 자신이 ‘망상’을 사랑하였음을 알게 됩니다(사 50:10-11, 말 1:2-13).
3. 주님에 대하여 난 더욱 모르네
아는 건 교리뿐 참 계시 없었네
넷째 날의 빛은 더 강한 빛입니다(창 1:14-16). 그것은 더 분명하고 더 섬세하게 우리의 존재들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의 기능들을 죽이기도 하고 우리의 봉사를 죽이기도 하며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도록 우리를 감소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빛은 더 강한 생명의 느낌을 우리 안에 산출하는데 우리는 더 이상 정체되어 있는 생명이 아닌 그분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이 되게 합니다.
4. 주 생명에 대해 내 인식 부족해
육체와 성령을 구분치 못했네
주님의 움직이심은 넷째 날의 빛이 비췬 만큼 산출되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다만 풀이었을 뿐이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푸성귀였을 뿐이며 무엇을 건축할 수 있다고 해도 다만 과일나무였을 뿐입니다(창 1:11-12). 그러나 넷째 날의 빛이 비췬 이후에는 사망의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가 되고 초월하는 새들이 되며 짐을 질 수 있는 육축들이 됩니다. 그리고…
5. 주 길에 대하여 난 혼미하였네
늘 치우쳤던 나 참 길을 몰랐네
이 빛이 사탄이 우리 안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우리를 드러내고 폭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창 1:26). 생명 안에서 성숙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드러내고 폭로하며 심지어 심판하는 많은 빛비춤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빛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사람들과 다투지 않게 되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6. 주 뜻이 무언지 난 알지 못했네
늘 내 마음대로 가시채 찼었네
빛이 많은 만큼 우리는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아는 만큼 사람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상태를 알게 되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우리의 목양은 피상적이지 않고 섬세하며 적절하며 공급을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오래 수고했지만 열매가 부족한 상태에 있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의 봉사와 수고는 효율적이고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요 15:2-5).
7. 주 교회에 대해 계시를 주소서
주님의 지혜를 취하게 하소서
우리가 생명의 체험의 어느 단계에 이를 때 그분의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고전 12:12). 그 이전에는 자신 안에서의 생명의 인식이었다면 이 시점부터는 더 이상 자신 안에서 만의 생명의 인식이 아닌 모든 사람들 안에서의 생명의 인식 안으로 이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 이상에 따라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실재 안으로 더 이끌려지게 될 것입니다.
8. 내 수건 제해져 빛 비춤 얻을 때
더 속지 않으리 교만치 않으리
영적인 노정 가운데 많은 위험과 속임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큰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손상시키고 자신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큰 망상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빛을 볼 것이고 이러한 실패가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처리되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시 36:9). 주님의 은혜는 어쩌면 우리를 이 지점까지 이끌기 위한 은혜인지도 모릅니다.
기도: 주님의 작은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모를 수 있는지요? 우리에게 첫째 날의 희미한 빛으로 인해 풀과 푸성귀와 과일나무가 있을 때 얼마나 우리를 오해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이 지점에서 더 이상의 성장이 없이 ‘망상’ 가운데 오래 머물 수 있는지요?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참 빛을 비춰 주소서. 더 교만치 않고 더 속임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소서. 더 이상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을 사랑함으로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에 이를 수 있도록…
* 이 찬송은 한국복음서원 찬송가 324장입니다. 가사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에 의해 지어졌고 곡은 William Howard Doane에 의해 붙여졌습니다.
* 교회 생활 초창기에는 특정 지체가 은사에 근거해서 좀 더 많은 기능 발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여러 방면에 기능 발휘를 하게 되며 특히 찬송을 선곡하는 데 있어서 좀 더 많은 기능 발휘를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지체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자랄 때 그러한 기능 발휘는 이전에 몸 안에 유익을 주었던 것만큼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몸 안에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 교회 생활 초창기에는 많은 지체들이 기능 발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이 더 전진된 단계 안으로 들어갈 때 그 때에는 누군가 기능 발휘를 하지 않아야 어떤 지체들이 기능 발휘를 할 수 있는 시점이 되기도 합니다.
* 지체들 안에서 생명의 작은 느낌이 있을 때 은사가 강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러한 생명의 느낌은 해방되지 못하고 쉽게 사장될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가진 지체들은 쉽게 자신의 은사를 파묻을 가능성이 있지만(마 25:18) 은사가 강한 지체들이 있을 때 더더욱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 몸은 어떤 지체도 자신의 생명의 느낌을 사장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해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더 강한 빛비춤을 통해 우리의 모든 기능 발휘가 생명에 속한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 : 성경진리사역원 http://www.btm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