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탐방(15) - 다윗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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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탐방(15) - 다윗성(1)
성경말씀
(삼하 5:6-10)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 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7)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8)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9)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삼하 6: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왕상 2:10)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
<사무엘하 L/S 메시지 2>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또한 그의 요새인 시온 성과 예루살렘을 건축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5장 9절). 더 나아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5장 10절). 이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음을 가리킨다.
<사무엘하 L/S 메시지 3>
사무엘 6장의 때에, 다윗은 어떤 것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만사가 다 다윗을 위해 협력했다. 그는 유다 지파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지파들의 왕이 되었다. 그는 요새인 시온과 수도인 예루살렘을 얻었다. 게다가,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진 궁전을 소유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그와 함께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에 대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백향목 집에 살고 있는 반면, 하나님을 대표하는 법궤는 여전히 집을 얻지 못했다(삼하 7:2). 그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영원한 거처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거처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Ⅰ. 위치 및 지형
A. BC 1000년경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여부스 족속의 성읍을 빼앗고 그 이름을 다윗성 또는 시온 산성, 예루살렘 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요압과 군사들이 수구를 통하여 올라가서 여부스 족속의 성을 빼앗으므로 요압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었다(삼하 5:6-8, 대상 11:4-9).
B.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33년 동안 예루살렘 성에서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삼하 5:4-5). 다윗은 30세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40년을 다스렸으며, 70세에 죽어서 이곳 다윗성에 장사되었다(왕상 2:10-11). 이후에도 솔로몬, 르호보암 등 많은 왕들이 다윗성에 장사되었다(왕상 11:43, 왕상 14:31).
C. 다윗 당시에 다윗성은 약 12에이커(1acre=약 4,046㎡) 정도의 규모에 약 2,000명이 거주하는 작은 성이었다. 후에 솔로몬 시대에 다윗성의 북쪽 모리아 산상에 성전과 왕궁이 건축됨으로써, 전체 다윗성은 약 32에이커(약 12만 9천㎡)로 확장 되었고, B.C. 8세기 후반 경 히스기야에 의해 북쪽과 서쪽으로 성벽이 확장 건축됨에 따라 다윗성은 약 170에이커로 더욱 확장 되었다. 따라서 ‘다윗성’이라고 할 때 다윗 당시에는 예루살렘과 동일한 명칭으로 사용 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다윗이 통치하던 자리, 곧 ‘시온 산성’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D. 최근까지만 해도 다윗성의 본래 위치가 어디인지에 관해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그 이유는 첫째, 다윗성이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뒤에 이를 한 번도 복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둘째, A.D. 135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이 지역의 대부분을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끈질긴 발굴 작업에 의해 몇몇 건물들의 유적과 유다 열왕들의 묘실로 추측되는 유적지가 발굴됨으로 다윗성의 본래 위치가 확인되었다.
E. 현재 확인된 다윗성의 위치는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와 서쪽으로 중앙(티로포에온, Tyropoeon) 골짜기 사이에 위치하며 동쪽의 경사는 약 60° 정도 된다. 다윗성에 최초로 요새화된 도시가 세워진 것은 중기 청동기 시대인 B.C. 2000년경이며,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으로 추측한다.
Ⅱ. 유적지 및 관광지
A. 다윗의 망대
1. 다윗의 망대는 예루살렘 구 시가지(Old City)의 자파 문(Jaffa Gate) 옆 성벽에 위치한 요새와 망루를 가리킨다. 사실 이 망대가 세워진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왕의 재위 기간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였으며, 나중에 ‘다윗의 망대’ 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2. 다윗의 망대는 예루살렘의 방어를 위해 가장 전략적인 장소에 위치하며, 고고학적 유물의 연대는 BC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요새와 망루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것은 BC 2세기로 알려져 있다. B.C. 2세기에 예루살렘 구 시가지는 오늘날 서쪽 언덕(Western Hill)으로 불리는 지역까지 확대되었으며, 여기에는 오늘날의 아르메니안 지구와 시온산으로 알려진 유대 지구가 포함된다. 그 후 히스기야 왕이 773m에 달하는 북서쪽 언덕 위의 성벽을 경계로 최초의 요새를 쌓았으며, 하스모니안 왕조 시기에 요새 가장자리에 망대 여러 개가 세워졌다. 하스모니안 왕조를 멸망시킨 헤롯 대왕은 B.C. 37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예루살렘의 방어 및 시온산 기슭에 위치한 왕궁 보호를 위해 세 개의 거대한 망대를 이 요새에 건설했다. 헤롯 대왕은 약 44m에 달하는 가장 높은 망대를 자신의 형의 이름을 따서 파사엘(Phasael) 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망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을 따서 미리암(Miriam)이라 불렀으며, 그녀의 사후에 망대의 서쪽에 매장했다. 세 번째 망대는 헤롯 대왕의 친구의 이름을 따서 히피쿠스(Hippicus)로 불렀다. 이 세 망대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파사엘 망대이다.
3. AD 70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요새는 로마군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한 뒤로는 수도사 공동체가 망대에 기거했다. 아랍인이 63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무슬림 지도자들이 망대를 보수했으며, 그 구조가 매우 견고해서 1098년의 십자군 공격을 막아 내었다. 십자군 통치기간 중 십자군은 요새 외벽에 해자를 만들었으며, 이 곳을 거점으로 자파 문을 통과하는 순례객과 대상들을 통제했다. 1187년에 살라흐 앗딘이 예루살렘과 다윗 망대를 점령했다.
4. 1260년에 맘룩(Mamruk)에 의해 망대가 파괴되었으나, 오스만터키 제국이 1537 - 1541년에 걸쳐 재건했다. 이후 약 400년 간 요새는 오스만터키 제국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과 첨탑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오스만터키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영국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으며, 영국 행정당국은 예루살렘의 역사적 유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다윗 망대를 보수, 복원했다. 1930년대에 다윗 망대 내에 팔레스타인 민속박물관이 개관했다. 1948년 제 1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윗 망대를 군사적인 용도로 활용했으나, 1967년에 제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면서 다시 문화적 기능을 회복했다. 이곳은 오늘날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로서, 내부에 고고학 박물관과 예루살렘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의 전경을 두루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B. 수로 시설(Water Systems)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기슭 기드론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기혼 샘은 도시가 생긴 이후 주민들의 주된 물 공급원이었다. 이 샘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솟아오르는 물은 일 년 내내 쓰기에 충분하다. 물이 골짜기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아마도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다윗 도성의 남서쪽 중앙 골짜기의 입구에 만든 못들에 물을 모으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낮은 지역의 지세는 충분한 양의 물이 모이는 못을 쉽게 만들 수 있게 하였다.
1. 워렌수구(Warren’s Shaft)
영국군 대위 워렌(Charles Warren)은 1867년 히스기야 터널을 탐색하다가 기혼샘에서 수직으로 위쪽으로 뚫려 있는 터널을 발견하였다(사진4. 워렌 수구 참조). 이곳은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 수직 터널이 수면에서부터 13m 높이로, 경사면의 터널로 이어지다가 계단식 터널을 거쳐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이것은 적에게 성이 포위 되었을 경우에도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지하로 연결된 터널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의 유일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판관들의 가나안 점령기에 이들이 열두지파에게 점령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천연적인 방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공격을 해오자 업신여기며 조롱을 하였으나, 다윗의 부하들은 이 지하수로의 비밀을 알아내고, 수로를 타고 올라가 철옹성 같던 시온 산성을 쉽게 정복 할 수 있었다. 이 지하수로는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워렌 수구’라고 부른다. 여부스족이 이용했던 이 수직통로는 암반에 나타난 수직 균열과 자연적으로 침식된 석회암 동굴 등 천연적으로 형성된 터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2. 실로암 수로(Siloam Channel)
이 수로는 약 400m 정도로, 남쪽으로 흐른다. 바위의 일 부분이 수로로 잘렸고, 돌로 덮였으며 부분적으로는 굴로 되어있다. 워렌 수직통로와 히스기야 터널이 지하 터널을 파서 물을 공급하는 통로와 수로라면, 실로암 수로는 기드론 골짜기의 바깥 경사면을 따라 흘러 기드론 계곡 아래쪽 400m 정도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지상에 만들어진 수로이다. 기드론 골짜기의 바닥 경사면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 다윗성 남서쪽 끝에 있는 못에 물을 모으고 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이 수로는 요새 밖에 위치하여 평화 시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3. 가나안 터널(Canaanite Tunnel)
1899년에 기혼샘에서 실로암 연못에 이르는 지역에 대하여 발굴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터널이 발견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나안 터널’이다(사진5. 가나안 터널 참조). 이 터널은 B.C. 1800년경인 중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가나안 터널은 120m정도로 히스기야 터널과 비슷한 모양이나, 물이 말라 있다.
4. 히스기야 터널
BC. 701년경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입하려는 것을 알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성 밖에 있는 기혼샘의 물줄기를 막고, 지하 터널을 파서 물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 들였다(왕하 20:20, 대하 32:1-5). 이렇게 기혼샘에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연결한 지하 수로를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부른다(사진6. 히스기야 터널 내부 참조). 히스기야 터널은 로마 제국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로는 가장 획기적인 지하 수로로 손꼽힌다. 그 이전에 있었던 워렌 수직 통로는 수로가 아니라 물을 길어 올리는 통로였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을 원활하게 공급할 수 없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샘이었던 기혼샘은 다윗 도성 동쪽의 기드론 계곡에 위치해 있고, 그 동쪽 건너편(현재 실로암 마을)에는 다윗 도성과 비슷한 높이의 언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혼샘을 성 밖에 두고 성벽을 건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시 남쪽에서는 실로암 연못을 포함하여 낮은 지역에 성벽을 건설할지라도 그 근처에 보다 높은 언덕이 없기에 적으로부터 방어가 용이하였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 왕은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하여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성벽과 우물을 확보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지킬 수 있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는 335m이지만 ‘S’자형 굴곡을 이루고 있어서 터널의 전체 길이는 533m이다. 터널 입구의 수로 시작 부분과 터널이 끝나는 지점의 높낮이 차이는 불과 30cm 차이로 533m나 되는 긴 거리를 무척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였다.
5. 실로암 비문(Siloam Inscription)
A.D. 1880년에 발견된 ‘실로암 비문’은 실로암 연못에서 수영을 하던 마을 아이들에의해 우연히 발견 되었다. 실로암 연못 쪽에서 6m쯤 들어간 히스기야 터널 동쪽 벽에서 발견 되었는데, 높이 38cm, 길이 72cm인 이 비문은 초기 히브리어로 된 것으로 왕국 시대에 속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본문이다. 여섯 줄로 2백자가 기록된 이 비문의 내용은 양쪽 터널의 일꾼들이 서로의 정과 망치 소리를 들으면서 파내어 오다가 서로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기록한 것이다. 이 실로암 비문은 현재 터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C.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
기드론 골짜기는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동쪽 모퉁이 부분에 위치 해 있고, 올리브 산과 성전 산 중간에 위치해 있다(사진8. 기드론 골짜기 참조). 골짜기와 구 시가지의 모퉁이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다윗성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신약에서는 ‘기드론 골짜기’라 불리지만(요 18:1), 이곳은 비교적 강우량이 부족한 건기에는 골짜기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가 되면 물이 불어 시내가 되어 사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이곳을 ‘기드론 시내’라고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삼하 15:23). 이곳 기드론 골짜기 서쪽엔 ‘기혼 샘’이 있었는데, 이는 구 시가지의 유일한 천연 샘이었으며, 히스기야 왕은 히스기야 터널로 물의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요긴한 식수를 차질 없이 공급했다. 이곳은 구약 시대에는 현재보다 12m 정도 더 낮았을 것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높아진 것이다. 예루살렘 북서쪽에서 시작된 계곡은 1.5㎞정도 흐르다가,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사해로 흘러간다. 이 골짜기가 일자로 되어 있었다면 대략 32km 길이 였을 것이다.
D. 기혼샘
다윗 도성의 동쪽 비탈길 기슭 기드론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기혼 샘은 도시가 생긴 이후 주민들의 주된 물공급원이었다 이 샘에서 하루에도 여러번 솟아오르는 물은 일 년 내내 쓰기에 충분하다 물이 골짜기에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실로암 못을 만들었다(BC701년경 히스기야왕이 만듬) 이렇게 기혼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연결한 지하수로를 히스기 야터널이라고 부른다 시리아로부터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성벽과 우물을 확보함으로서 가능했다 히스기야 터널은 553m로 전체 높낮이 차이는 30cm로 무척 완만한 경사로 물이 흐르게 하였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매우 놀라운 공법이었다.
다윗성의 위치
가나안 터널(여브스족) 요압이 이 터널을 이용하여 성을 정복함
히스기야 터널(앗시리아의 공경을 대비하여)
다윗의 망대 유물
가나안과 히스기야의 수로시설 기혼샘에서 시작함
다윗성 동편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 (서편에는 힌놈의 골짜기)
워렌 수구(영국군 대위 워렌이 1867년에 히스기야 터널을 탐색하다가 발견
실로암 비문(1880년에 히스기야 터널 동쪽 벽에서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