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론」 비판에 대한 재반박(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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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 삼분설> 비판 재반박
사람이 '영혼과 몸(이분)'으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영과 혼과 몸(삼분)'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오래된 토론 주제이다(http://www.biblechurch.or.kr/doct/pep2.htm, http://www.pillar.or.kr/Book/Book_wesley.html). 그러나 거듭 밝히거니와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는 핵심진리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정통과 이단을 가늠한다거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정죄 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이 둘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지는 겸손한 태도로 얼마든지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원세호님은 이런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정죄와 비난을 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는 참으로 신비하다. 인간의 지력으로 다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이 점을 잘 안다. 그러나 발목이 부러졌으면 정형외과를 찾아가고 우울증 증세가 있으면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해야 한다는 정도의 분별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들은 이러한 사람의 <신체>나 <정신>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부분에 질환을 가진 환자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을 영적인 세계의 문제라고 해 보자.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는 이런 영적 세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환자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영의 세계를 아는 전문가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http://www.sohm.or.kr/review/down_view.htm?idx=112&num=100, http://www.hfamily.co.kr/planning/2002-4-c.htm, http://www.singingwaters.org, http://www.rhema.org/healing/phc.asp). 이러한 정황은 사람이 <신체(body)>와 <정신(soul)>은 물론 이 둘과는 전혀 다른 <영(spirit)의 부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이 <기능상의 구분>이냐 <구조적인 구분>이냐에 이견이 있을 뿐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삼분된다는 것은 오늘 날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국제신학연구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 II, 서울서적, 1993, 182쪽, https://www.localchurch.kr/660). 물론 이러한 소위 '기능적 삼분론'이나 '구조적 삼분론' 그 어느 것도 영과 혼이 상호 교환적으로 쓸 수 있는 동일개념이라는 이분설과는 차이가 있는 주장이다.
또한 우리는 통상 장로교인들은 모두 <이분설>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예를 들어,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23년간이나 조직신학 교수로 있었던 안토니 A.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삼분설>은 물론 <이분설>까지도 반대한다. 즉 그의 지론은 사람을 이분이니 삼분이니 나누는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분설만이 유일한 정설이라는 원세호님을 포함한 일부 사람들의 편협한 주장과는 다른 입장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삼분론을 거절하는 것이 이분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인가?...그러나 우리는 삼분론 뿐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는 확실히 고대 헬라인들이 가르쳤던 의미의 이분론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된 본체...사고하는 영혼과 육체라는 견해를 제시했었다...그러나 분명히 성경에 어긋나는 이러한 헬라인의 이분론적인 이해를 차치하고라도 이분론이란 용어를 여전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분론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의 정확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용어 자체가 부당하다....뒤에서 보겠지만 성경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 하나의 완전, 하나의 단일체로 기술하고 있다(안토니 후크마/류호준 역, 개혁주의 인간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347-348쪽).
이제 이러한 전제들을 염두에 두고 원세호님의 무리한 비판들을 항목별로 간략하게 반박해 보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지방파에서는 '인간의 영, 혼, 몸은 각각 다른 실체이다. 그 근거로 살전5:23이 제시된다. 영은 하나님이 주셨고 혼은 생령이며 몸은 지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흙 사람(몸) + 네샤마 생기 = 생령 곧 영혼이 된 것이다.> <③ 최삼경 목사께서 지방파는 삼분설로 무서운 이단설이라 한데 불만인 지방파는...삼분설이 성경의 계시에 어긋나는 주장이면 바로 알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④ 지방파는 영과 혼이 하나인 것 같이 혼돈한 적이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영과 몸(육체)이 결합된 상태가 영혼이며... 영혼은 혼이란 생명현상 작용은 하지만 실존적 혼이 아닌 것이다.> <⑦ '워치만 니'는... 인간은 세 구분의 구성체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했으나... 영과 몸은 서로 다르나 영혼은 영과 몸의 결합체이므로 ...삼분설은 아니고 2분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위 인용문에서 같은 취지의 말을 항목만 달리해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요지는 1)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몸>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기>가 합쳐진 <생령>(영혼)이다. 2) 몸과 영은 실존이나, 혼은 생명현상 작용일 뿐 실존은 아니다(원세호님은 또 어느 곳에서는 혼을 실존이라고도 말함으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것이다.
1) 에 대해서는 양측간에 큰 이견이 없다(생령은 원문에 보면 '산 혼(living soul)'으로 되어 있다. 지방교회측은 '혼'을 사람의 한 부분의 구성 요소로 보기도 하고 사람 전체를 지칭할 때의 의미로도 이해하고 있다). 다만 2) 에서 <혼(생령)>을 영과는 별도의 <실존>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단지 어떤 것의 <생명현상 작용>으로만 볼 것인가에 이견이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삼분설, 이분설 논의의 핵심이다. 그 이외에 최삼경 목사가 '삼분설을 주장하면....무서운 이단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논할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삼분설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바로 말함으로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분설, 삼분설 대립을 근거로 자신과 다른 쪽을 이단 운운하는 것은 균형감각을 잃은 비판에 불과하다.
이제 삼분설, 이분설에 대한 지방교회 측의 입장은 무엇인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토대로 간략하게 요약해 보겠다.
(1) 영과 혼을 나눠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
이 세상에는 실익이 없는 논쟁도 많다. 특히 성경말씀과 무관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는 무익할 때가 많다. 혹자는 사람은 전인적임으로 이것을 이분, 삼분으로 나누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전인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이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이 성경 말씀을 지켜 순종하려고 할 때 사람의 영과 혼을 나누어 이해해야 할 불가피한 현실에 직면하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16:24). 이어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절)고도 하셨다. 위에서 <목숨>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은 <프쉬케>(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혼'(프쉬케)를 보존하거나 또는 부인하는 것은 주님을 계속적으로 따르는 노정에서 핵심 관건이 된다.
그런데 만일 <영>과 <혼>이 같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혼)를 부인할 수 있는가?
이분설 지지자들은 마16:24-25이 말하는 <부인하는 주체>와 <부인되는 대상(혼)>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혹자는 우리 안에 오신 주님으로 자기 혼을 부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과 혼을 동일실체로 보는 이분설 시각에서는 '주님과 하나된 영혼'이 '주님과 하나된 영혼'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 말이 안 된다. 논리구성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 이처럼 성도가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우발적인 체험은 있으되 지속적인 영적 진보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분설 지지자들은 머리 속에 <자기부인>에 대한 객관적인 성경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실제로 체험된 자기 부인의 역사는 그리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그 원인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영과 혼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 생명과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 만일 믿는 이가 영의 경계를 모른다면...어떻게 영성이 성장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이들이 영과 혼을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그들의 영적 생명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한다. 그리고...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랫동안 혼에 속한 생활에 거하고 영에 속한 것을 더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다수가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먼저...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 영에 속한 것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 30-31쪽). ('영에 속한 사람' 영어전문을 보려면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109C 참조).
따라서 성도들은 영적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과 혼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은 우리 깊은 속의 <연합된 영>(사람의 영+ 영이신 주님, 고전6:17)으로 우리의 <타락한 혼(생각, 감정, 의지)>을 부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갈2:20, 빌1:21). 물론 이런 이론을 아는 것이 이런 생활을 살도록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른 진리 인식이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2) 영과 혼을 분리해서 이해하는 근거
이분설은 영(spirit, 루아흐, 프뉴마)과 혼(soul, 네페쉬, 프쉬케)이라는 두 말이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됨으로 사실상 그것들은 <한 실체를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에 불과하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a) 로마서 8장 6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For the mind of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Jay. P. Green,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Hendrickson, p 915). "Now the mind of the flesh[which is sense and reason without the Holy Spirit] is death-death that comprises all the miseries arising from sin, both here and hereafter. But the mind of the (Holy) Spirit is life and soul-peace[both now and forever](존더반 출판사의 '확대 역 성경'(The Amplified Bible, 1972)).
위 확대 역은 우리 영 안에 계신 성령이 주시는 평강이 영으로부터 우리의 혼으로까지 확대되어 '혼의 평강'(soul-peace)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0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902
위 말씀은 또한 <생각을 육신에 두면 사망이고, 생각을 영에 두면 생명과 평안>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토마스 넬슨 출판사, 1978) 'For the mind set on the flesh is death, but 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 and peace'(1088쪽)). 결국 위 본문은 <육체와 영>, <생명과 사망>을 결정짓는 권한을 <생각>(혼의 주도적인 부분)에 부여하고 있다.
만일 2분설 주장처럼 생각이 '영혼의 한 부분'이라면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을 포함한 이분설 주장자들은 위 롬8:6에 근거하여 "항상" 생명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영과 생각>이 분리될 수 없는 <한 실체의 두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체험 상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영과 생각이 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영, 혼, 몸을 각각의 실체로 보는 3분설로 이것을 설명해 보겠다. 만일 어떤 거듭난 성도가 주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묵직하고 피곤하여 어찌할까를 잠시 고려하다가 주일 집회를 빠지고 늦잠을 더 자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생각을 육에 둔 경우). 그 결과 그의 몸은 다소 피로가 풀렸겠지만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주일 집회에 빠진 것에 대해 속은 편치 않을 것이다. 즉 영적 사망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몸은 피곤하지만 깊은 곳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여, 더 자고 싶은 육신의 욕구를 거절하고 주일 집회를 가기로 생각을 굳히고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보자(생각을 영에 둔 경우). 이 때 그는 몸은 조금 고단하겠지만 주일 집회로부터 얻은 은혜로 인해 깊은 속에 평강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 16:24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은> 경우에 해당된다.
위 두 유형 중 우리의 체험과 일치되는 것은 당연히 삼분설에 근거한 설명인 후자이다.
만일 2분설 주장처럼, <영>과 <생각(혼)>이 한 실체라면 어떻게 생각이 한 실체인 영을 거스리고 도리어 다른 실체인 <육신>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b) 누가 복음 1장 46-47 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My soul doth magnify the Lord, And my spirit hath rejoiced in God my Saviour).
위 말씀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에 대해 반응한 대목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영>이 구주 하나님을 기뻐했고, <혼>은 주를 찬양한다고 했다. 이렇게만 보면, 영과 혼이 구별 없이 교대로 사용된 채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위 말씀에서 마리아가 <영>으로 구주를 기뻐한 시점은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이다(hath rejoiced). 그런데 마리아의 <혼>으로 주를 찬양한 시점은 <현재시제> 동사를 쓰고 있다(magnify).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리아의 깊은 속에 있는 <영>이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였고 그 영의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친 결과로 그녀의 <혼>이 주를 찬양하게 된 것이다. 두 동사 시제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영과 혼이 각각 다르며 두 존재의 반응시점도 각기 다른 것을 증명한다. 영과 혼은 이처럼 차이가 있다.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설명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1679).
(c) 히브리서 4장 12절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되나(살전5:23),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인류의 타락으로 사람의 영의 기능이 약화된 이후 사람의 영과 혼의 기능상 구분은 더 어려워졌다. 이것을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믿는 이가 거듭나기 전, 그의 영은 혼 안으로 타락하여 혼으로 포위되고 조성되어 혼과 하나가 되었다. 결국 영의 기능과 지각은 혼과 섞여져서 무엇이 혼에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영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영의 주된 기능은 상실되고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영은 혼의 부속품같이 되어 버렸다. 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강해질 때 자연히 영의 기능은 사람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거듭난 후에도 혼과 영이 분리되는 역사가 필요하다"(위 영에 속한 사람, 45-46쪽).
그러나 거듭 난 사람은 처음엔 여전히 이런 구분이 희미하지만, 점점 우리 존재의 깊은 속 영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편의상 이것을 연합된 영, 속사람, 새사람이라고 해 보자)과 우리의 <변화 받지 못한 생각, 감정, 의지>(혼, 겉사람, 옛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가 말씀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해 갈 때 우리 깊은 속에 있는 연합된 영의 원함과 이것을 거스리는 것과의 '대비'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이것을 히브리서 4:12의 영과 혼을 찔러 쪼개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안에 신체(body)는 아닌 두 세력 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즉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교제를 통해 영적 상태가 좋을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가 타락한 혼을 이기고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성경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경우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나쁠 때는 깊은 속의 영의 요구는 묵살되고 우리의 옛혼(옛 사람의 생각, 감정, 의지)의 요구가 밖으로 실행된다. 이것은 반대로 <내 안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사는> 경우이다. 이런 것들은 거듭난 성도들의 일상적인 체험이지만 영과 혼을 구분(분리)하지 않으면 체계적인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영과 혼을 다른 두 존재로 보아야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제 히브리서 4장 12절의 '영과 혼'을 조금 폭 넓게 접근하여 해석해 보겠다.
4장 전체의 문맥은 히브리서 수신인들에게 '안식에 들어 감'을 촉구하는 내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8절에서 '여호수아가 주는 안식'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우리는 이 안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Let us labour...)고 말함으로 이 안식이 다만 물질적인 가나안 땅만이 아님을 암시한다. 즉 여기의 안식은 저자(바울)와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을 포함한 영적이고 현재적인 의미의 안식을 포함한다.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안식에 들어감을 힘쓸 것>과 <순종치 아니한 본을 따름>을 대비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이어서 12절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는 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도록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위 11절에서 언급된 '저 안식'(that rest)을 우리 영 안에 오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46). 왜냐하면 우리는 마11:28에 근거하여 주님께 나아갈 때만 참 안식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거하는 동안 자신들의 불신하는 생각, 변덕 많은 감정, 거스리는 의지(혼)로 의심하고 불평하고 거역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했다.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를 영접했던 이 서신서의 수신인들도 유대교 사회와 참된 교회 생활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혼 (생각, 감정, 의지)안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방황하는 오늘날의 믿는 이에게도 거의 동일한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늘 우리의 혼의 방황을 끝내고 우리의 영과 관계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릴 이끈다. 혹은 은혜의 보좌로부터 얻은 넘치는 공급으로 우리의 혼의 방황이 끝난다.
중요한 것은 안식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의 영 안에는 늘 <안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과 방황>은 거의 우리의 혼-특히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식과 방황은 결코 같은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또한 <안식이 있는 영>과 <방황하는 혼(생각)>도 동일 실체의 다른 표현이 아니다. 우리의 방황하는 혼은 깊은 속의 안식의 영에 의해 부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황하는 혼은 안식인 연합된 영에 순종함으로 안식이 우리의 혼 안으로도 역사 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식 안에 들어가도록 힘쓰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된 영의 요구를 거절하고, 굳은 마음과 따지는 생각 안에 머물므로 영적인 메마름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히브리서 4장의 해석방식은 우리의 체험에 기초함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1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2
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7257
2) <원세호님의 비판: ②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을 혼이라고 성경이 부른다 라고 주장한다. '워치만 니'가 인간을 혼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46:27에서 '두 명'의 '명'은 nephesh이며, 이것은 창2:7의 흙으로 사람(몸)을 지으시고 네샤마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 곧 영혼이 되었다는 생령이며, 영혼 자체는 혼 작용을 하는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혼이 만들어져 영과 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흙 몸 사람 ← 네샤마 = 생령 (네폐쉬)인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실존적 특수 개념으로 생령 곧 영혼은 nephesh나 (퓌쉬케)이며, 일반적 개념으로 혼이며 숨, 냄새, 향기, 정신, 심령, 마음, 생명력, 욕망, 갈망 등 일반적인 생명현상과 실존적 개념으로 자신, 당신, 사람 영혼 실존으로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실존 생물체에도 사용되었으며, 창1:20;21;24; 2:19; 9:12;15;16; 레11:46; 17:14등 움직이는 생물체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nephesh가 생명으로 생명현상으로도 사용된 예가 있다. 창1:30; 9:4;5; 19:17;19;20;30;32;등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nephesh는 생명현상을 표현한 마음으로 나타났으며 ;창23:8; 27:4;19; 25;31; 34:3;8;42:21; 출15:9등에 사용되었다.
nephesh가 실존개념 사람으로 사용된 예증인 창12:5; 14;21; 36:6; 46:27; 레7:20;21;25;27; 17:10; 잠6:30; 11:30; 19:15;25; 렘43:6 등은 사람으로 번역된 nephesh인 것이다. nephesh가 영혼 실존으로 계시된 예증인 욥 7:11;10:1;27:2;8;33:28;30,영인데 영혼으로 번역된 곳은 애1:16; 합2:10등 많이 있다. 지방파의 과오는 생령 곧 영혼 실존체를 그 생명 현상 개념들 중에 '혼'을 택하고 영혼 실존을 부인하고, '혼' 작용 현상을 실체 혼으로 주장하므로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살전 5:23은 삼분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영은 속 사람(롬7:22; 요3:6; 히12:9)이요 '혼'은 (퓌쉬케)로서 영혼체이며(창2:7), 몸은 육체를 나타내는 것이며, 혼은 영과 육체의 결합 실존체인 것이다.>
** 반박: 원세호님이 인용한 워치만 니 원문은 <② "우리는 생령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을 혼이라고 부른다(창46:27; 두 명과 70명 = 네폐쉬).">(18(혼의 잠재력). p.11,9-15)라고 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원세호님은 우리가 생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인가? 창세기 46:27은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혼'(two souls)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혼'(all the souls...threescore and ten)이었더라'고 말한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지적한 인용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3) <원세호님의 비판: ⑥ 지방파는 히4:12절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삼분설이라고 주장하지만 혼은 영과 육체가 결합된 실존이며, 인용된 성구는 영과 몸(관절과 골수)에 대한 교훈인 것이며 그것은 삼분설을 지지하는 성구가 아니다. 그 증거는 창2:7; 약2:26의 근거에 의한다. 그리고 영혼이 혼이 아닌 증거는 마10:28이다>.
** 반박: 우선 워치만 니의 원문을 인용해 보자. <⑥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 구절에서 기자는 인간의 비육체적인 부분을 혼과 영으로 분리하고 있다.">(24.(영에 속한 사람들) p.35).
우선 원세호님의 용어 사용에 문제가 많다. 성경 원어나 영어에는 우리말의 '영혼'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다만 영이면 영(네샤마, spirit), 혼이면 다만 혼(네페쉬, 푸쉬케, soul)일 뿐이다. 그러므로 몸과 혼과 영에 해당되는 단어들이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도 각기 다르고 다른 단어임으로 셋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 혼, 몸에 대한 다른 단어 존재 자체가 인간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음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피터 럭크만, 조직신학IV, 말씀보존학회, 1995, 55쪽).
정확히 말하자면, 창2:7의 '생령'도 '산혼'(living soul)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원세호님이 위에서 <영혼이 혼이 아닌 증거는 마10:28이다>라고 할 때 그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마10:28의 영혼의 원문은 혼(soul)임). 또한 만일 원세호님의 말대로 <영혼= 몸+영>이라면, 위 마10:28 본문처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일이 가능한가? 또 뒤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이란 말씀도 모순된다. 영혼은 몸을 포함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또 별도로 언급한단 말인가? 이처럼 위에서 원세호님이 인용한 구절들은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허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 창2:7이나 약2:26도 원세호님 주장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
히4:12 의 영과 혼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으되 각기 다른 단어요 다른 개념이다. '관절과 골수'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관절과 골수가 해부학적으로 같은 개념임으로 영과 혼도 동일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두 단어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서 관절과 골수는 정확히 일치하는 동일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세호님은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라는 히 4:12 본문을 <영과 몸(관절과 골수)에 대한 교훈>이라고 함부로 풀어서 말했다. 즉 임의로 <혼>이란 말씀을 성경에서 누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교리를 위해 성경 말씀을 임의로 삭제할 권한이 없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⑧ 인간의 영은 입김의 영이며 생령이 된 것은 몸이 영과 교접(례18:23 ; 짐승과 여자가 교합하는 행위 ; 서로 맞다아서는 행위, 성교를 의미함)을 했을 때 혼이 생겼으므로 사람은 생혼이라고 번역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의 영은 입김의 영이 아니다. 영은 인격체의 실존이며 거듭나며(요3:6),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존재이며(히12: 9), 생령은 생혼으로 영과 몸이 성교하는 식으로 결합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성경을 알지 못하는 주장을 하다니? 무슨 영과 몸이 교접해서 혼이 생기는가? 성경의 근거가 없는 거짓 주장일 뿐이다.>
** 반박: 우선 원세호님이 사용한 번역서 용어사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워치만 니 본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겠다.
# [생명의 말씀사 번역] <⑧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는 말은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요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입김의 영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말은 몸이 영과 교접을 했을 때 자아를 의식하는 산 사람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생혼이라고 번역된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이 연합된 삼위일체이다.">(24. (영에 속한 사람) 정동섭 역, 생명의 말씀사, p.38)
# [한국복음서원 번역]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것은 사람의 몸을 말한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그 사람은 「산 혼」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혼이다. 영이 사람의 몸을 살렸기 때문에 사람은 산 혼이 되었고 살아 있으며 자각(自覺)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온전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 셋이 하나로 화합된 존재이다>(워치만 니, (중국어원문직역) 영에 속한 사람, 한국복음서원, 2000, 33쪽).
# [영어본문]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This refers to man's body.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This refers to the fact that man's spirit comes from God. This man then became "a living soul." This speaks of man's soul. When the spirit caused the body to come alive, man became a living soul, a living person with his own consciousness. A complete person is a tripartite being, a person with a spirit, a soul, and a body>.
원세호님은 특정 번역용어를 트집 잡아 상식 이하의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세호님이 사용했던 번역본은 워치만 니 신앙을 잘 모르는 외부 사람들이 번역한 것이다. 독자들은 한국복음서원의 중국어원문으로부터의 직역과 위 생명의 말씀사 책자(정동섭 역) 그리고 영어 원문을 상호 비교한 후 원세호님의 비판이 얼마나 원문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파악해 보기 바란다. 차제에 진리비판과 진리 관련 책자 번역은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원세호님은 선정적인 특정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보다는 그 단어의 원문을 찾아보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
5) <원세호님의 비판: ⑨ 지방파는 겉에는 몸, 몸 안에는 혼, 혼 안에는 영이 있다고 하지만(14. p.16 ;하3-1, p.17;1 - 4 , 워치만 니), 사람인 영혼 또는 생령은 영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 실존이며 영혼체에는 몸이 겉 사람이고 속 사람인 영이 있다(롬7:22-23).> <⑪ 워치만 니는 '속 사람 영 바깥에 생각, 감정, 의지 작용하는 혼이 있고 혼 바깥에 육신 몸이 있다' 라고 주장한다. 영과 몸 사이에 생각, 감정, 의지 작용의 혼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맞지 않는데,> <⑬ 워치만 니 인간론은 '영, 혼, 몸으로 순서를 하는 것은 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며, 몸은 가장 낮은 것이고, 혼은 중간에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반박: 원문인용후 반박해 보자.
<위트니스 리 주장: ⑨ "우리 사람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일 밖에 있는 부분은 몸이며 몸 안에는 두 번째 층인 [혼이 있으며 혼 안에는 세 번째 층인] 영이 있다. 오늘 그리스도는 영이시며, 우리 속에는 또한 영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을 체험할 수 있다. 주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서로 섞이고 서로 교통한다. 이는 마치 감전과 같은데 오직 금속품만이 감전한다.">(14.(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p.16-17).
원세호님은 비판대상 자료를 신중하게 인용해야 한다. 위 인용문 중에서 [ ] 부분 안에 있는 내용은 원 자료에 있으나 원세호님이 누락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워치만 니가 아니라 위트니스 리이다.
성경은 '사람 속에 있는 영'(the spirit of man which is in man)을 말한다(고전2:11). 또한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혼(soul)을 바꾸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마16:26). 사람 안에 영이 있고 혼이 있다면 각각 어디에 있는가? 위트니스 리는 가장 깊은 곳에 영이 있고 몸과 영 사이에 정신세계인 혼이 있다는 것이다. 원세호님이 인용한 롬 7:22-23은 이분설이 아니라 오히려 삼분설을 지지하고 있다: <속 사람(영)-하나님의 법>, <생각(혼)-생각의 법>, <지체(몸)-죄의 법>(http://online.recoveryversion.org/FootNotes.asp?FNtsID=3873). 우리의 체험을 돌아보아도 이것은 쉽게 증명된다. 우리 속 사람(영)의 반응은 생각으로 대표되는 혼 안에서의 갈등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6) <원세호님의 비판: ⑩ 지방파는 성경은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세 부분으로 된 분명한 구별이 있는 실존이라 주장하며, 그 증거로는 눅1:46-47절을 제시했으나 이는 인간의 3분설을 지지하지 않으며, 히4:12절을 제시했으나 이는 인간의 세 방면이고 부분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창2:7; 약2:26이 있다. 빌1:27절은 아무 상관도 없는 근거이다.>
** 반박: 눅1:46-47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즉 마리아의 영과 혼의 작용을 묘사하는 동사의 시제가 각기 다른 것은 둘이 동일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원세호님의 위 <히4:12가 인간의 세 방면이고 부분은 아니다> 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이것이 삼분설이 틀렸고 이분설이 맞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빌1:27은 영과 혼을 각각 구분하여 말하고 있음으로 삼분설의 근거이다.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은 <한 생각(혼:원어참조)을 가지고 한 영 안에 서서(ye stand fast in one spirit with one mind)>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거듭난 자들로서 그들의 연합된 영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혼의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 안에서는 각기 의견이 달랐다. 그러므로 영 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혼) 안에서도 하나되라는 것이다. 그 길은 어느 특정인의 생각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생각(mind)을 갖는 것이다(빌2:5). 원세호님 같이 영과 혼의 구분을 부인하면 이러한 성경 본문의 섬세한 이해에 어려움이 있게 된다.
7) <원세호님의 비판: ⑫ 지방파는 '영은 주인, 혼은 청지기, 몸은 종과 같다'하나(롬8:6-7; 7:24-25), 비성경적이며 성경의 근거가 없다. 그 이유는 영은 그 자체가 생각하며 의지 작용 등 생명현상을 지니고 있는 영적 실존체이다(롬8:6-8;8:13). 그리고 몸은 동물적 사유와 유사한 생각들을 한다.>
** 반박: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하겠다.
<워치만 니 주장: ⑫ "인간의 영은 본래 인간의 존재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으로서 혼과 몸은 영의 슬하에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영은 주인과 같은 존재이며, 혼은 청지기, 몸은 종과 같은 것이다.">(24.(영에 속한 사람) p.70).
물질 세계와 정신세계 그리고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은 일반 통념이다. 그리고 정신세계가 물질 세계를 주관하고, 영적인 세계가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다스린다는 점도 큰 무리가 없이 받아 드려진다. 이러한 질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의 생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워치만 니 책자에서 발견되는 사례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워치만 니가 어느 곳에 복음전도차 갈 편도 차비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돈마저도 어느 동역자에게 주라는 깊은 속의 음성이 있어 생각 속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동의하고 그 돈을 건네 주었다. 물론 이러한 순종으로 그 동역자 가족의 그 당시의 긴급한 필요가 채워졌고 워치만 니의 차비도 그후 다른 성도의 공급으로 넉넉히 충족되었다. 여기서 그의 <생각>(혼)이 당장의 필요만 보고 더 깊은 곳의 성령의 요구를 거절했다면, 그의 <손>(몸)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그 동역자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의 '생각'(혼의 주도적인 부분)이 깊은 속의 '영'의 지시에 순종하여 '몸'에게 지시함으로 <영의 의도>는 <혼(생각)>을 거쳐 <몸>의 실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을 성경대로 설명한 것이 위 원세호님이 인용 소개한 롬8:6-7; 7:24-25이다. 자신이 성경근거를 이처럼 인용소개 해 놓고도 무조건 '비 성경적이며 성경의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원세호님의 영도 생각을 하고 사람의 몸도 생각을 한다는 말이 과연 체험적으로 맞는 주장인가? 사람의 몸인 신체구조 자체가 심리기능에 속한 생각(사고)을 한다는 원세호님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인간론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8) <원세호님의 비판: ⑭ 지방파에서는 10. p.50;하1-6줄에 많은 성경을 인용하고 삼분설 삼일 하나님의 관계를 증거하며 제시했으니 이를 검토하기로 하자.
요1:1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히2:14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심 위해 혈육에 속하심), 요1:29 (세례 요한의 증거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고전15:3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위해 죽으심), 요3:14 (모세가 뱀을 든 것이 인자도 들려함), 요12;31-33 (세상임금 추방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예언), 갈6:14 (바울의 자랑 십자가), 롬6:6 (십자가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지 못하게 하심임), 갈2:20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 갈5:24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 요12:24 (한 알의 밀의 죽음사건), 벧전1: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 요1:12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심), 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됨), 출30:25 (구약 성전용 관유 제조법), 롬8:2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킴), 고후3:6하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 창2:7 (생령 인간을 만드심), 잠20:27 (여호와의 등불은 사람의 영혼임), 요3:6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임), 딤후4:22 (주께서 심령에 함께 하심 ; 심령 <푸뉴마-토스>), 고후3:10 (영광될 것이 더 큰 영광 위해 영광 될 것이 없음),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임), 롬8:6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롬8:4 (육신 쫓지 않고 영을 쫓아 행함)(10. p.50,하1-6; 위트니스 리).
위와 같이 성구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 3분설 같은 것이나 3.1하나님에 관한 증거가 불확실하며 증거가 될 수 없다. 거짓된 자들의 성경 제시는 주제와 상관없는 것이 일반 상례임을 알아두자.>
** 반박: 원세호님은 저자의 의도와 다른 관점에서 위 말씀을 봄으로 촛점이 빗나간 검토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입증하는 한 예를 들어보자. 원세호님은 위에서 요1:14를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육신 안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따라서 원 저자가 위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에 그 강조 점을 둔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잘못된 연구를 해 놓고 '증거가 불확실하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원세호님은 좀더 신중한 연구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삼분설을 믿으면 원세호님 주장처럼 성경에 없는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 그러한 사실이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삼분설을 지지한다. 미국 기독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 삼분설을 지지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코필드는 그의 살전5:23 주석에서 영과 혼은 나뉘어 질 수 있고, 사람이 죽을 때 '혼 적인 몸'(soma psuchikon)을 심고 '영적인 몸(soma pneumatikon)으로 일으켜 진다는 점(고전15:44)에서 영과 혼이 동의어가 아니다 라고 한다. 스코필드는 만일 영과 혼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죽을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2 분설을 반박한다.
이제 강력한 삼분설 지지자인 스코필드의 살전5:3의 관련 주석 영어원문을 소개함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That the human soul and spirit are not identical is proved by the facts that they are divisible(Heb. 4.12), and that soul and spirit are sharply distinguished in the burial and resurrection of the body. It is sown a natural body(soma psuchikon = "soul-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soma pneumatikon), 1 Cor. 15.44. To assert, therefore, tha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soul and spirit is to assert that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mortal body and the resurrection body...'(the Scofield Reference Bibile, 1909, 1270 쪽).
4. 원세호님의 지방교회 <인간과 3.1하나님과의 관계> 비판 재반박
원세호님은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진리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처신했어야 했다. 즉 원세호님은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역대의 정통 성경교사들의 이에 대한 가르침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연구해 보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클레멘트(150-215),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Basil(330-379) 등이 활동하던 2-5 세기 만해도 이 진리가 보편적으로 가르쳐진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방정교회 신학은 현재도 신화를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로 가르친다. 한국 교계 내에서도 교부들의 문헌을 접할 수 있거나 말씀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하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가 공개적으로 이 주제로 설교한 바 있다(https://www.localchurch.kr/922, http://www.kumnan.com/preaching/preaching.php?method=content1&no=667&start=0). 그렇다면 이들이 다 '교만하고 건방진 행위를 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이 주제에 대해 간략하게 반박하고 대신 구원론 서론에서 별도 항목으로 다루겠다.
1) <원세호님의 비판: ①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인 당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사람 생활은 하나님이 사시는 생활이다 란 주장이다.... 그것은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인간은 하나님으로 살수는 없다. 다만 순종을 통해서 인간 되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지만 피조물로서 온전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말 곧 하나님 되라는 말은... 교만한 것이며 건방진 행위이다.> <②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모양과 형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성은 없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실제적이며 참된 자녀가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피조물일 뿐이다....우리도...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요3:16)....성경에서 어느 피조물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이라 한 자가 있는가? 지방파들 뿐이라 사료된다.>
** 반박: 우선 위트니스 리의 원문을 인용하고 반박해 보자.
<위트니스 리 주장: 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하나의 선한 기쁘심이 있다. 이것은 당신을 그 분과 똑 같이 만드는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당신은 또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가르침은 어떻게 거룩하게 되어 승리하는 가에 관한 것이다. 나는 믿는 이로서의 초기 시절에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한 많은 책들을 보았지만 그러한 책들은 참되게 그 길을 보여 주지 못했다. 어떻게 거룩케 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삶으로 거룩케 될 수 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사람의 생활만이 가능하다. 당신은 하나님-사람으로서 하나님께로서 나고 하나님의 종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라">(27(하나님-사람의 생활). p.20). <② "아담은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형상만 가졌을 뿐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은 없었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그 분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그 분에게 태어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실제적이며 참된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실제적이며 참된 자녀들이다...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그 분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사람들이다.">(27. p.41)
분명히 말하건대,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표현은 피조물이 경배 받는 창조주가 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역대로 아타나시우스를 포함한 정통 교부들도 위트니스 리와 동일한 표현을 썼지만 그들도 사람이 창조주가 된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단지 사람이되,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요1:12-13, 골3:4),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벧후1:4)는 의미에서 제한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표현일 뿐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사람(들)>이 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의 요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영접한 사람을 <그리스도인(그리스도+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차분히 따지고 보면 문제될 것이 없는 말이다. 또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여러 번 말했다(갈2;20, 빌1:21).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은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미로 사람인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고 말했던 교부들과 그 문헌출처를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클레멘트(150-215) : '...신성한 능력과 본질을 붙잡음으로 하나님 된다'(We become god by grasping the divine power and substance).
# 성 어거스틴(354-440) : 하나님이 사람까지 낮추셨다면...사람을...하나님들 되게 하는(If God humbled Himself to become man, it was in order to exalt men and to make them gods)(Serm 13, de temp).
# Justin Martyr(2C): '시 82:6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들이 될...'(It(시82:6) is demonstrated that all men are deemed worthy of becoming "gods" and of having power to become sons of the highest)(Dialogue with Trypho 124).
# Irenaeus of Lyon(2c) : 그분은 우리를 심지어 그분 자신의 어떠함까지 되게 하시며(that He might bring us to be even what he is Himself)(Against Heresies, BK. V, preface).
# Hippolytus of Rome(3c) :'...하나님으로 만드시는...(Thou shalt be a companion of the Diety, and a co-heir with Christ,...For thou hast become God... having made thee even God unto His glory!)(Refutation of all Heresies, BK. X, ch. 30).
# Basil(330-379) :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의 소망 중에 하나님이 되는 것보다 더 숭고한 것은 없다'(De Spiritu Santo, chap9 NO 23).
이 모든 정통 신학자들이 원세호님 보다 성경 진리를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어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원세호님은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던 진리의 세계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처럼 자신의 한계 내에서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경솔하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원세호님은 요1:12-13 의 <하나님의 자녀><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란 성경본문의 참된 의미를 성경 그대로 읽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얻은 생명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신' 바로 그 생명이다'(요5:26, 요일5:12).
2) <원세호님의 비판: ③ '우리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다'라고 주장한다. 위의 주장은 정신이 없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해도 바울은 영원히 바울이며 그리스도는 아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이 창조되었으나(창1:26-27)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어도 본 받은 자가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 두렵고 떨리는 자들이다>
** 반박: 원세호님은 영으로 오신 하나님과 연합된 새사람의 인격을 사는가? 아니면 이미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옛사람의 인격을 사는가? 만일 전자라면 원세호님의 인격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일 것이다. 만일 후자라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타락한 원세호님 자신>이 인격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말이다. 아래 위트니스 리의 말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주장: ③ "자아가 더 이상 우리의 인격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제 우리의 인격이시다. 더 이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다.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32. (주의 회복) p.53).
5) <원세호님의 비판: ⑥ 지방파는 피조된 동물들과 같이 특별한 종이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의 종류에 속한 하나님들이라고 주장한다...하나님을 종이라고 하다니 불경스럽다. 인간이 거듭났어도 인간의 영이 그 신분이 변화된 것이지 영이 다시 만들어 졌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났더라도 양자의 신분이며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사람들은 잘못된 주장이다>
** 반박: 우선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인용해 보겠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 ⑥ "우리의 두 번째 출생은 우리로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게 하며 하나님의 종류가 되게 한다. 동물들과 사람들은 각기 그들의 특별한 종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종류에 속한 하나님들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종류에 속하는 하나님-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27.(하나님 사람의 생활) p.19).
물론 성경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종류>란 말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이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없지만 그러한 사상이 성경에 충만함으로 우리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거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분명히 말한다(요일3:9). 원세호님은 <하나님의 씨>란 말이 성경에 있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씨의 종류와 그로 인하여 난 식물의 종류가 같은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이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썼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이 성경에 분명히 있음으로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도 아버지와 그의 자녀들은 같은 종류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그 아버지의 자녀들이 곧 그 아버지 자신임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원세호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되 법적인 양자일 뿐 직접적인 생명관계는 없다고 믿으면, 참된 거듭남은 체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의 생명 되신 <하나님 아들 자신>이 생명 주는 영으로서 직접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연결은 없고 단지 법적으로만 자녀가 되는 세속적인 양자관계가 아니다.
3) <원세호님의 비판: ④ 성소-혼, 지성소-영, 마당-몸으로, 도형 비교 관계를 맺는 것은 성경 근거 없는 거짓 교훈이다. 더욱이 혼이라는 성소는 더욱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7(하나님의 경륜). p.40 ; 위트니스 리)....'지성소→영-가나안, 성소→혼-광야, 마당→몸-애굽' 성경의 근거가 없고 성경에 맞지도 않는 거짓말이다.>
** 반박: 고전3:16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한다. 또한 요2:19-21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느뇨...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물질적인 성전이 신약에 와서 사람 성전으로 전환된 것을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위 말씀은 예수를 죽일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막14:58). 원세호님도 성전에 관해 이러한 눈먼 유대인들과 동일한 관점을 가졌을까봐 우려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원세호님은 <바깥마당, 성소, 지성소>로 구성되었던 구약의 성전과 <영, 혼, 몸>으로 구성된 성전된 우리는 어떻게 대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소개해 주기 바란다.
또한 히10:19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예수의 피를 힙 입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는 어디인가? 히4:9, 11은 또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구약의 가나안 땅에 대비될 만한 신약의 어떤 실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어가길 힘써야 할 안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 영 안에 계신 안식이신 그리스도가 아닌가? 히10:20은 성소의 휘장이 우리의 육체를 가리킨다고도 말한다. 이처럼 성경은 많은 곳에서 물질적인 성전과 성전 된 사람을 연관지어 말하고 있다.
따라서 원세호님이 문제 삼은 도표는 이러한 말씀들과 우리의 체험을 근거로 제시된 것이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면 성경근거가 없고 거짓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한 처신일 수 있다. 원세호님이 교회 역사 상 가르쳐졌던 교리들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선봉장이었던 말틴 루터도 사람의 세 부분과 바깥마당, 성소, 지성소에 대해 정확히 동일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치 못할 것이다.
4) <원세호님의 비판: ⑤ 히브리서4:12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에 대한 성경에 의하면 영과 혼의 분리를 언급했다고 하고 혼으로부터 영을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크게 잘못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몸과 영이 분별되었고 분리를 언급했을 뿐 혼의 분리는 성경의 근거가 없다. 히브리서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과 예리함이 미치는 부분에 대하여 말함이며, 3분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파의 영, 혼, 육(몸)의 3분설은 비성경적이면서 성경에 더하는 범죄이다>.
** 반박: 히4:12에 대해서는 앞의 <인간 삼분설> 재 반박 시 충분히 설명했다. 이 본문은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존중하기 바란다. 원세호님도 자신의 성경 지식과 교리로만 알고 말하는 단계에서 더 전진하면 좋을 것이다. 생명 되신 주님을 참되게 영접한 사람은 깊은 속으로부터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안다. 또한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말을 무리 없이 받을 수 있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 ⑤ "히브리서 4:12은 영과 혼의 분리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알고 좋은 땅이며 안식이 되시는 그 분 안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혼과 영을 분별해야 한다. 영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려면 우리의 혼으로부터 영을 분별해야 한다. 이 구절은 영과 혼 사이에 차이 뿐 만 아니라 몸의 관절과 골수, 생각과 마음의 뜻의 차이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산 말씀은 이 모든 것들을 분별시킨다.">(7.(하나님의 경륜)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