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교회 구원관 비평에 대한 간략한 해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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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구원관 평가에 대한 간략한 해명
섭리라는 영어 필명을 가진 한 분이 나름대로 본인의 관점에서 본 지방교회 구원관에 대한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간략한 해명입니다. 편의를 위해 원글의 직접 관련 내용만 이곳에 인용 소개하면서 답글을 달았습니다.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여본 것입니다.
1. 혼합교리 구원론?
(섭리님) “칼빈주의는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인 구원을 신자는 수용적으로 받는 것을 말하지만 알미니언주의는 결과적인 효력을 지니는 결단주의를 주장합니다…이렇게 구원에 있어 하나님 편에서의 단독적 주권을 부인하고 신자 편에서의 구원의 긴장을 없애는 한국 교회를 장악한 왜곡된 구원론을 일컬어 최근 한 저자는 아르뱅주의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지방교회 신자들도 실제적 적용에서 이와 유사한 구원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답변(또는 해명): 원칙적으로 위 섭리님의 단정은 ‘보입니다.’ ‘때문일 것입니다’, ‘보여집니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본인의 추측과 가정일 뿐임으로 크게 비중을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지방교회 교회자료 공간에 올려진 글임으로, 오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략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 지방교회측의 구원관은 소위 “아르뱅주의”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 전의 선택과 구원 그리고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최종적으로는 모두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화롭게 되어 단체적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고 가르치는 점에서 칼빈주의 성도의 견인을 강화하고 완성시켰습니다. 또한 생명의 성장의 정도가 천년왕국 또는 주님의 재림 시점까지 표준에 이르지 못했을 때 ‘경륜적인 징계’를 받을 것임을 분명히 가르침으로 칼빈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고 알미니안주의의 장점을 살렸습니다. 이것은 엡1:4-5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의 계획부터 그 계획이 성취된 최종모습인 계21:2, 10에서의 새 예루살렘까지의 성경 전체의 구원의 진리에 대한 종합적인 빛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롬8:28-29에서 보듯이 거듭난 이후 믿는 이들이 겪는 모든 환경은 겉사람이 파쇄되고 속사람의 생명의 실재가 증가하도록 생명을 얻고 더 얻게 하기 위함이며 결과적으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환경을 안배하신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이런 구원관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는 목표를 추구했던 사도 바울의 구원관과도 부합합니다(빌3:8-16).
2) 따라서 소위 구원파의 구원관은 위에서 설명한 지방교회측의 구원관과 전혀 다르며 직접적인 연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원파 출신 지체들이 지방교회측에게 연결되는 경우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그래도 참된 죄사함의 확신과 생명의 인식과 체험은 그분들이 보기에 다른 교단들보다는 그래도 지방교회측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로 구원파 성도님들의 대부분은 그 이전에는 장로교단을 포함한 소위 기성교회에서 구원파로 유입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3) 그리고 원글에서 ‘신앙적 실재’를 언급하셨는데, 저희가 본 높은 이상(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신격에서는 아니나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는 것)에 비춰볼 때 저희의 현실이 그와 간격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결국에는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빌1:6).
4) 섭리님은 칼빈주의를 구원의 표준교리처럼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한국에서 만큼은 ‘구원받았으니 어짜피 천국은 간다’는 식의 성도의 견인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인하여…(1) 세상의 원리가 교회에 유입되는 뒷문을 열어 주었고 결국 교회의 세속화와 방종주의를 불러오거나 (2) 아니면 주일성수 십일조 등을 신자의 자격조건 더 나아가서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율법주의로 빠지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국 덴버신학교 정성욱 교수님의 최근 소논문들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1. 기쁘지도 두렵지도 않은 복음?
(섭리님) “지방교회등의 이런 식의 복음은 그리 기쁘지도 그리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만들어 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은 받되 소위 이기는 자는 아니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대부분 가게 되는 그다지 기쁘지도 그다지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답변(또는 해명): 지방교회측이 전하는 복음은 1) 우리의 죄들이 주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받았다는 것과 2) 주님의 이름을 불러 그분을 생명과 영으로 영접하면 그 영께서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영과 연합되신다는 것과 3) 거듭난 이후 생명이 성장하여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고 마침내 그분의 영광 안으로 이끌리려면, 이 땅에서 자기부인이 필요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장차 혼인잔치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으며 모든 참된 거듭난 성도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이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제가 아는 복음 또는 구원관 중에서 이처럼 균형잡히고 성경적인 복음과 구원관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기쁘지도 두렵지도 않은 복음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저의 경우는 그분의 사랑에서 나온 죄사함과 생명을 거저주심에 기뻐하고, 장차 공의로 심판하실 그분 앞에 두렵고 떨립니다.
1.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섭리님) “참고) 마태복음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라는 표현은 6차례 사용을 통해 … 명백히 지옥에 쓰입니다 그런데도 지방교회가 이 바깥 어두운 곳을 상급이 없는 신자가 가는 제3의 장소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개념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반펠라기우스적 으로 흐르게 될 뿐입니다.”
답변(또는 해명): 성경 해석은 그 문맥의 흐름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25:30은 ‘한 달란트 받은 노예’에게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불신자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본문 도처에 있습니다. 1) 14절에서 주인이 자기 소유를 불신자에게 맡겼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2) 15절에서 ‘자기 종들(노예들)에게 다섯, 둘,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이 세 유형 모두가 불신자이거나 모두가 신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이들 모두는 당연히 신자들입니다. 3) 이 세 유형은 심판의 시기가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신자의 심판은 혼인잔치 이전 즉 천년왕국 ‘이전’인데 반해(고후 5:10), 불신자 백보좌의 심판은 천년왕국 ‘이후’입니다(계20:11-12). 그러므로 이들은 신자들입니다. 4) 그는 심판하시는 분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지 않습니다. 5) 무엇보다도 이 비유는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서 거듭나라는 교훈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사람이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라는 교훈입니다. 이런 엄중한 교훈을 무시한 결과(마25:30)를 불신자가 지옥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가 어느날 자신이 바로 여기의 ‘한 달란트 받은 종’에 해당되어 동일한 징계에 놓인다면 그 장본인은 물론 그동안 이 말씀을 오해하여 잘못 가르쳤던 성경교사들에게도 책임이 클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