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교회 구원관 비평에 대한 간략한 해명(2)
- 새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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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화-신인협력설?
(섭리)”워치만니가 영향 받은 속생명파를 비롯한 정적주의 계열에서는 실제로는 신인협력설이지만 표방하는 언어가 단동설적으로 들리므로 언어 자체에 스스로 현혹되게 됩니다 결국 자아를 부인하지 못하여 이기거나 성화되지 못한 책임은 자기에게 갈 뿐입니다 생명에 있어서도 내적 느낌이 아닌 외적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답변(해명):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신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고후5:10, 롬14:10과 그 전후 문맥을 선입관없이 숙고해 보실 것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마지막 조언에서 외적인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은 공감합니다.
1. 모든 참된 신자는 영적인 그리스도인?
(섭리)”참된 신자는 심지어 생각을 영에 두지 않는 순간에도 그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여전히 지속적으로 성령의 지배와 통치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이러한 상태를 불신자와 달리 매우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따라서 거듭났지만 일시적으로 순종하지 않는 신자일지라도 성령은 통치하시며 일단 거듭난 신자를 영화롭게 될때까지 성화시키시므로 이들은 결코 영적이지 않은 상태나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며 순종하지 않을 때 괴로우므로 회개하게 됩니다 정통 신학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처음 부터 거듭나지 않은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봅니다.”
답변(해명): 거듭남은 영적 출생에 불과합니다. 영적 성숙의 표시가 있기까지는 수없는 시행착오와 실패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가 그러하고 생명을 아는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예가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만일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그들은 유월절과 홍해건넘을 체험했음)을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 취급하는 것은 참된 주 안의 자녀를 불신자 취급하는 심각한 오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소위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온갖 죄악이 있으되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유사 그리스도인’(또는 불신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기들”(고전3:1)입니다.
개혁신학의 경우 위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고린도 교인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기들”이 참되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할 여지는 없는지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생명의 성숙’에 대한 진리가 가려져 있음으로 거듭남 자체에 너무 많은 영적인 비중을 얹어버린 결과일 수 있습니다.
“정통 신학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처음 부터 거듭나지 않은 유사 그리스도인으로 봅니다.” 이 표현은 장점처럼 보이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즉 정통신학일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닐 수 있습니다.
1. 죄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구원론?
(섭리님)”이러한 신학적 정의가 바로 설 때 비로소 단독적으로 구원의 전 과정을 혼자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설명되며 인간이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오직 은혜로 가는 신자의 구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죄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택하신 자에게 전달 됩니다 잘못된 구원론은 오류가 있는 종말론을 초래하는데 이르며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의 분류 자체가 결론적으로 여러차례에 걸친 휴거를 주장하는 부분 휴거설로 연결됩니다.”
답변(해명): “단독적으로 구원의 전 과정을 혼자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표현은 성화에 신인협력이 필요하다는 말과 충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불순종함으로 생기는 생명의 성숙의 지연을 간과한 교리입니다.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 하는지”(빌2:12)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역시 장점처럼 보이는 개혁신학의 단점중 하나입니다.
죄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구원론은 죄와 죄들을 구분하여 죄사함은 십자가의 보혈로, 죄자체(단수)는 우리의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롬6:11) 해결된다는 바른 죄론을 전제해야 합니다. 또한 죄를 압도적으로 이기신 분, 죽었다가 사신 분, 생명주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신다는 생생한 사실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 구원론은 결코 실제적으로 “죄를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의 교계 현실입니다. 이것이 죄를 압도적으로 이긴 모습이라면 매우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1. 신화사상은 동방정교회 신학?
(섭리)”논란이 많았던 지방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오랜 기간을 걸쳐 현대까지 유지 되어온 이레나이우스 아타나시우스 계열의 동방 정교회 신학과 같으므로 그리 새로울것이 없으며 위트니스 리 개인의 새롭게 계시된 최고봉의 진리로 지방 교회 신자들이 오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다만 안셀무스나 터툴리안 게열의 서방교회 신학에만 익숙한 지방교회와 개신교 일반 신앙인들에게 새롭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질 뿐 입니다.
답변(해명): 만일 신화사상이 동방교회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면 오늘날 지방교회측이 신화사상을 말한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하고 참람하다고 말하는 분들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잘 모르면 서로 배우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섭리님은 이 방면에 상식이 있으시네요. 한국교계의 소위 이단감별사들이 섭리님 만큼이라도 상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 LSM 로고사용
(섭리)”서울 교회를 비롯해서 홈페이지에 LSM 로고를 붙여 놓는 이상 한명의 현대판 사도가 쓴 교리를 읽는 집단만을 지방 교회로 인정하며 아닌 경우에는 교제안에 있지 않다는 명목으로 지방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 교단주의에 다름 아니므로 지방 입장 주장에 대해서도 당초 워치만니의 취지에서 멀어진 이율 배반적인 형태로 봅니다.”
답변(해명): LSM 로고는 지방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만일 외부인들에게 오해를 주는 면이 있다면 지적하신 서울교회 홈페이지에서 그 로고를 삭제하는 것도 좋다고 느낍니다.
댓글 26
1)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치 육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말해야만 함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으며 6:19에서는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미숙하다는 의미일 뿐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3) 3절에서 '아직도'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현재의 상태보다 성장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와 같다'라고 한 이유는 그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전1: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육신의 방법'대로 행동했습니다. 마치 중생하지 않은 자들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신에 속한'이란 행동의 미숙함을 말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5)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2에서 고린도교인들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 불렀습니다.
-2:4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1:30에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하였으므로 그들이 의롭다 함은 받았으나 거룩하여지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3:21-23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육에 속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6:11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장의 시제는 3장에서 '육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던 그들이 이미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후5:17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새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의 행실에 잘못이 있을지언정 그들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1) 이 개념은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람을 중생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요3:3, 5),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요3:36), '육신을 따라 사는 자'와 '영을 따라 사는 자'(롬8:5),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고전2:14-15)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종류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2)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회심 이후 두 번째의 구별된 단계가 있음을 함축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두 번째 단계가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회심자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3)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도 주님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모임에서는 종종 소위 '육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를 왕좌에 앉혀드리고 '그를 당신의 인생의 주로 삼도록' 하라는 호소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게 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신약성경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라고 말합니다. 골로새교인들에게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주로 만드셨습니다(행2:36).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언제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며 순종 가운데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온전히 왕좌 위에 앉아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입니다.
4)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어떤 사람이 육신을 따라 (즉 우리 안에 아직 남아있는 죄된 성향을 따라) 행하거나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스코필드 성경의 주석이 '육적인 사람'을 '육신을 따라 행하여 그리스도 안에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새롭게 된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놀라운 비밀을 아십니까?"라는 CCC 소책자에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성경구절 중 하나는 롬8:7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저등급'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중생하지 않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8절에서는 7절에서 묘사한 사람들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9절에 이르러서는 '너희(로마의 그리스도인들)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갈5:16에서는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고,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덧붙입니다. 분명 모든 신자는 여전히 육신의 유혹을 받고 있고 때로 거기 굴복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육신 안에 혹은 '육신을 따라' 행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참고 동영상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W-s3ftynGs#t=109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까?
예! 단지 듣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 역시 조건이 아니며 우리가 결정을 하지도 말고 회개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예! 믿음은 선물이고 들음에서 나오며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히는 것이며 완전히 새로움과 그에 따른 즐거움으로 사로 잡히는 것이며 은혜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조건적 약속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다! 악한 세대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다." 라는 순전하고 무조건적 공표, 따라서 이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단호한 주장 즉 죽음과 부활에 맞서는 법을 배우는 것을 배우는 일만 남은 것 입니다.
위 칼빈주의의 어려움은 1.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처음부터 지옥가도록 예정해 놓음으로, 본인에게 전혀 선택권도 안 주어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게 만든 다음 결국 고통받는 지옥불에 쳐 넣은 하나님이 과연 공의의 하나님인가? 하는 의문(최근들어 이 방면의 교리는 답변이 곤란하여 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지요)에 답이 궁색합니다. 2.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해 놓고 나중에 행위대로 심판하시고 벌 주시는 것(고후5:10, 롬14:10, 고전3:15)과 혼인잔치에도 못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칼빈주의 체계에서는 '경륜적인 징계'를 말하는 성경의 구절들이 거의 다 무시되는 방향으로 왜곡되게 해석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장로교단이 대부분인 한구교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목회자, 장로, 성도님들이 얼마나 될까요? 만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 있다면 현재와 같은 현상이 벌어질까요.... 나타난 현상 뒤에 교리적인 모순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백지 상태에서부터 검토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가는 다섯 처녀는 구원하는 은혜인 기름이 없는 자였습니다. 한달란트 가진자의 변명이 모조리 거짓임을 주님께서 꾸짖으셨듯이 다섯 처녀도 처음 부터 참된 신자가 아닌 증거 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나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19)
신앙은 묘사가 아니고 이루어야 할 목표물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해라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인격이 되셔서 사랑이 되심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이자 실물로서 복음이 되십니다. 여기에는 영과 혼의 날카로운 구분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 온 영혼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영인지 혼인지 구분하는 대신, 묘사적 혹은 정보 전달의 2차적 언어로서의 말씀이 아니라 실상으로 수용하는 선포적인 1차적 언어로서의 말씀을 대함으로 그 분은 우리에게 실재가 되실 것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블랙홀 같은 우리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