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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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문제에 관하여
‘섭리’님은 ‘지방 교회측 사람들이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두렵지 않은 복음을 만들어 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과연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신약이 증거하는 왕국(천국) 복음이 과연 두렵지 않은 복음일까요? 섭리님의 지적을 계기로 성경적인 두려움이 과연 어떤 것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함.
“(섭리)PROVIDENCE 2014.05.15 15:11:47 실제 지방교회 안에 성부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실제로 적용에서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지 않는지가 중요하겠지요”
오늘 아침에 말씀을 읽는 중에 마침 주제와 관련이 될 만한 성경구절들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돌려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보상이 클 것이고, 여러분이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눅6:35-36)
‘보십시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대해서 들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결말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정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약5:11)
위에서 보듯이 신약에서 계시된 성부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할 면만 있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매우 인자하시고(kind), 다정하시고(tenderhearted), 자비로운(compassionate) 분이십니다. 특히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로서 아버지를 합당하게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우리에게 어떤 성부 아버지를 갖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잘못에 대해 가차없이 벌 주시는 성부 하나님만을 너무 강조한다면, 그 사람은 어느새 자신도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 살되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고 구약의 율법 아래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관하던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달리,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좋은 것을 거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다정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심지어 징계하실 때에도 우리를 아들처럼 대하시지(히12:7), 재판장이 죄인 다루듯 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성부 하나님을 구약의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처럼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한편 성부 하나님을 참되게 두려워하는 것은 외적 공포심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성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징계의 목적인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것”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인 우리가 거룩한 속성을 떠나 세속화 되고 종교화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 나눠주심(요10:10하)에 반응하기 보다는 윤리와 도덕과 철학과 심리학 등 세상의 지혜를 설교에 섞고, 헛된 영광을 생명보다 귀히 여겨 그것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2. 심판장이신 주 예수님을 두려워함.
“(섭리님) 지방교회 등의 이런 식의 복음은 그리 기쁘지도 그리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만들어 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은 받되 소위 이기는 자는 아니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대부분 가게 되는 그다지 기쁘지도 그다지 두렵지도 않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방 교회측이 증거하는 천국 복음은 어느 값싼 복음처럼 사탕발림의 복음이 아닙니다. 죄사함 받아 칭의를 이뤘으면 어찌하든 다 천국(천년왕국)에 들어 간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심판은 받되 큰상 작은 상만 결정하고 벌은 없다고 하는 이런 것이야 말로 “두렵지 않은 복음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신 인자(사람의 아들)를 무시하는 복음입니다.
만일 어떤 분들이 거듭난 사람도 천년왕국에 못 들어 갈수 있고(마7:21), 우리 믿는 이들이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상뿐 아니라 심각한 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행한 것과 말한 것에 따라 그대로 심판받는다 라는 복음을 듣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듣는 그 사람의 문제이지, 증거하는 쪽에 책임이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과 삼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사람들은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이 그리스도를 얻어 그분의 충만인 몸을 건축하라고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날 때 내적인 두려움과 죄송함이 있습니다. 몸으로 행한 바 대로 의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안의 생명의 영의 법을 어기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댓글 21
신자가 두렵고 떨리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신 이 '은혜'를 하찮게 여기거나 이 '은혜'를 취하는 것에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뿐 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소위 지방교회식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복음" 은 매우 반펠라기우스 적(인간의 공적이 결과적으로 작용) 입니다.
로마서 14장 10절의 심판대와 그 전후 문맥에서의 분위기를 인용하셨는 데 컨텍스트를 완전히 정말 완전히 놓치신 듯 합니다. 앞 부분은 로마 교회에서 율법적인 유대인과 이방 종교를 믿던 이교도 회심자들이 약한 자들로 묘사되며 복음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을 강한 자들로 설정하며 양자간의 용납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설명 드리지만, "왜 그대는 형제를 판단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라는 말은 로마 교회의 당시의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들과 이교에 물들어 있던 자들과 같은 연약한 형제들에 대해 없신 여기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무슨 심각한 분위기라고 오해하시나 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반대입니다.
4절의 내용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꼐 있음이니라" 약한 자들 모두 주의 종이므로 세움을 받는 다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컨택스트가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를 언급하는 것이 신자에게 벌 주는 심판대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심각한 분위기라구요? 설명드립니다.
로마서 14장 11절 "기록되었으되 주꼐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라" 구절은 아래의 사야 45장 23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플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위 이사야서의 또 한번의 인용은 빌립보서 2장 10절에도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본문에서 심판이라는 단어의 앞뒤 문맥이 심각하여 상급 뿐 아니라 벌주는 것이라는 근거로 제기하셨는데 그 정확한 해답은 13절에 나옵니다. 무릎 꿇을 자들인데 감히 '하나님 노릇' 하지 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신성 모독적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대로 컨텍스트를 놓치시거나 성경의 평행한 구절을 놓치면 자의적 해석이 되어 버려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중대한 신학적 오류를 낳게 됩니다.
물론 이 심판은 말씀하신 대로 아래의 고린도후서 3장 12절~15절과 같은 심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러나 본문의 해석은 명확합니다. 불은 인간적인 재능이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면 불타 없어지고 그 속에서 구원을 받는 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명확합니다. '공적'이 어떠한 것임을 시험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원합니다. 이는 상급에 대한 것입니다. 또 다시 죄를 거론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과 완전성을 상쇄기켜 버리며 신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은혜도 기쁜 소식도 아닙니다.
언약신학의 한계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대체신학이요, 종말론이 약한 신학이요, 경륜이 빠진 신학이라서 교회론 마저 바로 설 수 없는 신학이며 그러다 보니 구속사 중심의 인본주의 신학으로 흐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 드렸듯이 언약신학과 세대주의의 장점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더 연구하셔야 할 것은 그렇게 약점이 많은 언약 신학도 구원론 하나는 지방 교회 보다 훨씬 더 견고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장 부분은 윤리적으로 설명하는 교파만 보셔서 그렇습니다. 그건 율법주의에 불과합니다. 맞습니다. 생명이 자라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설명과 적용이 다르다고 진작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 적용이 틀렸기에 지방교회의 신앙적 실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교회의 상태에 대해 자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은 천년왕국을 통과하여 최종 영화의 단계로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죄사함과 거듭남이 적용되는 신자가 누구인지가 정확히 정의되어야 참다운 교회의 범위가 설정되어 이 교회가 참다운 새예루살렘의 전단계로서 그 아름다움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제가 속하고 싶지 않은 타락한 거짓 교회들에 대해서 비판하시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십니다. 아니라고 말씀 드렸는데 다시 하시고 계신것을 보면 지방교회적 신념으로 외부인에 대한 사고가 고착되신 듯도 합니다.
완전한 기쁨 속에만 머물고 있냐고 질문하셨지요? 네 율법이 아닌 자발적인 종말론적 흥분을 맛보는 완전한 복음의 기쁨을 맛보지만 여전히 완전한 죄인의 상태 동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2분설자들도 성경이 이 영혼을 하나님과 가까운 것으로 묘사할때는 영이라는 단어를 더 높은 빈도로 사용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다만 날카롭게 분리할 수 없을 뿐이지요. 그러나 조심하셔야 될 것은 그 영안의 실재는 바깥의 말씀을 통에 내주하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타인에게 행할 때 느낌은 살아나지만 내적 느낌 만을 주목할 때 느낌은 약해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오셔서 신학용어를 사용하여 이상한 인상을 갖도록 모자를 씌우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인간의 공로로 몸이 건축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충만케 될 때 몸이 거축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더 누리고 얻기만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지방교회측의 인간 편에서의 동역의 실체입니다. 반펠라기우스니 하는 이상한 신학용어를 함부로 적용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섭리님이 이곳에 글을 쓰시는 동기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음을 유념하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