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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성령론 관련 책자나 논문들을 읽어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 제일 난해합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지금처럼 우리 안에 영접되어 내주하시는 분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규명하고자 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진리항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 주제를 언급한 관련 성경 본문들과 그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흑백을 가리듯이 사람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주제를 지금과 같은 제한된 공간과 여건 속에서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라는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토론하기에는쌍방 모두에게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따라서 섣부른 속단과 정죄가 아닌 서로 보완하여 완전한 그림을 함께 그려 간다는 자세로 이 주제에 접근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토론은 다음 4 가지 양보할 수 없는 전제 조건들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재림하실 것이다 (행1:11)-그러므로 이미 재림하셨다고 말하면 안 된다. 2.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존재론적으로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시지 않는다(마28:19, 요14:10-11)-따라서 세 위격이 ‘분리’된 것을 주장하면 안 된다. 3.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7)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같은 성경 본문들을 믿어야 한다-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내주하심을 부인하면 안 된다. 4. 교리보다 성경본문이 우선이다-사람의 특정 교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단 한 구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 자체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전제들을 바탕으로 매일의 삶속에서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그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드리고 이어서 이 분에 대한 몇분의 신학적인 관점들을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신 온전한 하나님께서 제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을 믿습니다(골3:4, 요14:17, 20). 즉 이 분은 제 영 안에 영접되셔서(요3:6) 포도나무와 가지들처럼 저의 영과 한영으로 연합되어 계십니다(고전6:17, 요15:5). 삶 속에서 저의 혼(내 생각, 내 의지, 내 감정)을 이 분에게 굴복시킬 때(마16:24), 이분의 생명과 인격이 저를 통해 살아 표현되시는 것을 봅니다(갈2:20, 빌1:21). 그러나 이 분의 인도를 거스리고 옛사람의 상태를 고집할 때는 타락한 자아가 살아 표현됩니다. 이 때에는 영적인 사망(롬8:6) 즉 깊은 속에서부터 어둠과 약함과 확신이 없어짐과 양심의 책망을 느낍니다. 이러할 때 내적 싸움이 있으며 결국 빛가운데 나아가 자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구할 때 즉시로 해방과 밝음과 생명력을되찾습니다.

 

그러나 깊은 내면에서 저를 주관하시는 이 분이 보혜사 성령이신지 아들 하나님이신지 또는 성부 이신지를 인간 이성으로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을 따라 이 분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내주하시는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물론 이것은 삼위 하나님은 특정인 안에만 제한되어 내주한다는 말이 아니며, 무소부재하시는 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거듭난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시는 분-보헤사 성령?-은 과연 누구이실까요?

 

이와 관련하여 서울신학대학 신약학 교수이신 김희성 박사님, 총신대 신대원 교수이신 이한수 박사님 그리고 풀러신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스미디즈 박사님의 주장을 차례로 인용 소개해 보겠습니다.

 

“부활한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부활을 경험한 최초의 초대교회는 부활하여 영 존재가 된 주와 성령과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115쪽)

 

…하나님의 구원행위 가운데 중요한 것은 낮아진 그리스도의 높임, 즉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은 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영(성령)은 예수께서 그의 부활을 통하여 들어간 천상적인 존재의 영역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영은 부활하여 천상적인 실존영역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할수 있다(119쪽)

 

…부활한(그리하여 영 존재가 된) 예수와의 만남이 성령 경험의 사건 혹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에 잘 반영되어 있다…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원초적인 성령경험은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경험은 동시에 기독교의 가장 깊은 계시를 직접 받은 사건이라고 할수 있다(121쪽).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는 다른 인격이다. 예수가 제 1의 보혜사이듯이 그는 제2의 보혜사이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의 제2의 자아이다.(281쪽)

 

…예수는 보혜사 안에서 현재적이다. 그는 영으로 그의 사람들에게 온다. 분명히 제4복음서 기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성령의 오심이 일치한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은 근본적으로 올리우신, 말씀을 통하여 자기의 공동체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그리고 그들의 실존과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계시되어지시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282쪽).””(김희성, 부활신앙으로 본 신약의 성령론, 대한기독교서회, 2000).

 

“어떤 학자들은…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리우심을 받았기 때문에 땅 위에선 계시지를 않고 이제는 성령이 예수를 대신하여 일하신다는 ‘부재기독론’ (absentee Christology)을 옹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위에서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이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의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자신에 의해 이뤄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다(행9:34)

 

’주의 손’이 그들가운데 그들과 함께 있어다고 할 때 이런 표현들은 성령으로 활동하시는 예수 자신의 활동임이 분명하다(99-100쪽).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우리가 주장하는 요점은 요한이 보혜사를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성령으로, 즉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의 인격적인 임재로서 제시한다는 것이다(116쪽).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성령’이란 보헤사 성령이 다름 아니라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떠나 세상에 없는 동안 신자된 사람들의 삶에 계시는 예수의 인격적 임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121쪽) (이한수, 신약의 성령론, 총신대학출판부, 1994).

 

위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는 유사한 관점을 보이나 요 20:22에서의 ‘성령을 받으라’ 해석에 있어서는 이한수 교수님은  "미래의 선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씀"으로(위책, 145쪽), 김희성 교수님은 "약 오십일 후에 성령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위책, 254쪽) 같은 본문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관련 성경해석이 쉽지 않고 따라서 특정교단 신학만을 절대시 할수 없음을 보여주는 작은 창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루이스 스미디즈 박사의 주장을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잉고 헤르만) 성령은 단지 그리스도와 한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자신의 구속적 기능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85-86쪽)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은 자신을 한 인격체로서 다른 사람에게 계시하고 알리시는 행위에 나타난 그리스도 자신이다…성령은 세상에 있는 그의 특별한 백성들과 자신의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는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Church Dogmatics, IV/2, p 522) (86쪽)

 

(C. H. Dodd)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The Apostolic Preaching(New York, 2nd, 1954), p 62).(86쪽)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 방식이 아니었다.

 

그분(성령)은 한 인격체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이 연합의 더 깊은 의미들을 계속해서 탐구하기로 하자(88쪽)”(루이스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

 

요약하자면,

 

위에서 현재 정통 신학자 범주로 평가되시는 분들의 위격의 혼동(또는 2격과 3격의 동일시)으로 보일 수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관련 언급들을 모아서 소개드려 보았습니다. 이것은 1) 성경에 계시된 성령과 성자의 관계를 너무 단순화 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 있다. 2) 따라서 외견상 성령과 성자를 동일시 하는 듯한 표현을 무조건 양태론이다 라고 쉽게 정죄해서는 안된다(만일 그렇다면 위 인용된 신학자들이 먼저 그 정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임), 3) 보혜사 성령 중심의 신관을 고집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신다는 성경본문들을 부인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추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 중입니다. 우선 현재 상태로는 1)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분리불가함, 2) 삼위의 경륜적인 방면과 존재론적인 방면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방안 연구, 3) 경륜적인 삼위일체(기능상)에서 위격 간의 동일시 이론 원용 등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주제는 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김호식 박사께서 칼빈 신학의 한계로 지적한 바 있는(성령론, 도서출판 한글, 1998, 131쪽 참조), 칼빈의 영적 임재설의 연장선에서 우리 존재 안에 삼위의 실질적인 내주를 부인하려는 듯한 소위 ‘안에’에 대한 독특한 신학적 관점은 "상대적" 주장일 수는 있으되 신앙의 대상이 되는 절대적 진리로 받기는 어렵다는 점을 첨언해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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