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적인 삼위일체- 위격간의 동일시 문제
- 새예루살렘
- 261
- 0
경륜적인 삼위일체 - 위격간의 동일시 문제
이 주제는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어렵다는 삼위일체론 중에서도 더 난해한 부분이고, 한국 교계 내에서 이단을 감별하는 분들이 특히 오해하고 있는 항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필요가 있다고 느껴져서 간략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주제를 깊이 연구하고 고민한 분이 아니라면 추가 토론은 사양합니다.
-삼위일체의 양 방면을 균형있게 취함
삼위일체 관련 성경 기록은 대략 두 방면으로 분류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련된 것과 그분의 기능과 일에 관한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시는 분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을 <존재론적(본질적/ 내재적/ 본체론적)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나는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10) 라고 하신 것은 이 방면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러한 위격간의 상호내재는 어떤 이유로도 깨지거나 해체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요8:16, 29에 의하면, 성부께서 성자를 이 땅에 보내신 후에도 성부는 이 땅에 오신 성자 안에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한국 교계 내 상당수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 점을 간과합니다.
또 다른 방면은 하나님의 일과 기능의 방면입니다. 이것을 경륜적(또는 경세적)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마3:16-17). 그렇다면 이러한 침례 전에는 성령은 아들께 가까이 오신 적이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성령과 성자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상호 내재 하시는 사이 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두 방면은 제한된 사람의 지력으로는 체계적으로 조화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두 성경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교리적인 선입관을 버리고 성경 본문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만 아멘하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신자이지 특정 교단 교리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
많은 분들이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고,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라는 공식에 익숙합니다. 또는 성자는 낳으심, 성령은 발출, 성부는 그 근원이라는 말로 삼위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의 방면에서는 삼위가 ‘구별’되심으로 이런 이해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말씀하는 성경본문 자체가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함으로 위 전제를 깨뜨리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답은 간단합니다. 즉 존재론적으로는 삼위의 구별을 영원히 유지하되, 동시에 일과 기능에 있어서의 위격 간에 동일시를 말하는 성경본문도 또 그대로 아멘으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본문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9:6). (2격=1격)
-“주는 영이시니(Now the Lord is the Spirit)”(고후3:17). (2격=3격)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 일곱뿔과 일곱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영이더라”(계5:6). (2격=3격)
위 본문들은 모두 문맥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양의 일곱 눈은 일곱영이더라>는 말씀은 <아들은 저 하늘에 남아계시고 이 땅에 보내진 영은 3격 보혜사 성령 만이다>라고 믿는 분들을 곤혹스럽게 할수 있습니다. 어떻게 2격에 속한 어떤 부분(눈)이 3격이 될수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일 이러한 동일시를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양태론이라고 정죄한다면 자신은 정통인지 모르나 성경본문과 이것을 쓴 사도 요한은 이단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무모한 일이 지금까지 한국 교계 내에서 일부 이단감별사들에 의하여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
성경본문이 경륜적인 방면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함을 제대로 이해한 신학자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글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박형용 박사(수원 합동신학대학원),개핀 교수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께서는 논문을 통해 고후3:17, 고전 15:45 등의 본문을 토대로 2격 아들 하나님이 기능과 일에 있어서(즉 경륜적인 방면에서) 3격 성령과 동일시 된다고 말합니다. 그외에 아래 열거한 신학자들도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로마서 8:9-1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기준이 되는 성령의 내재를 내재 하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며, 종말에 있을 믿는 자들의 몸이 부활의 보증임을 보인다.”(김정주, 바울의 성령이해,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11쪽)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임.
“주는 영이시니(고후3:17)…결국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성령은 삼위일체의 제 3위이시다. 바울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루이스 B.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 64-65쪽)
“바울이 주와 성령을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구절(고후3:17)을 주석하는 가운데, 칼빈은 바울이 “단순히 그분의(즉 성령의) 직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 부활하신 중보자와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위책, 61쪽).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쏜튼(L.S. Thornton)은 자신의 성령에 대한 교리를 칼빈이 사용한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다른 자아(the alter ego of Christ)라고 부른다”(위 책, 61쪽 각주 12, 원 출처: The Common Life in the Body of Christ[Westminster, 1946], p. 347).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령은 자신을 한 인격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알리시는 행위에 나타난 그리스도 자신이다…성령은 세상에 있는 그의 특별한 백성들과 자신의 공톧체와 그 구성원들의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위 책, 86쪽, 원 출처: Church Dogmatics, IV /2, p 522)
“(C. H. Dodd)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위 책, 86쪽, 원 출처: The Apostolic Preaching(New York, 2nd ed., 1954), p.62).
“이 시대에서 성령은 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나님의 영이 창조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이제도 우리의 경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효과적으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위 책, 202쪽).
-결론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사도 바울과 칼빈을 포함하여 한국교계 내에서 인정을 받는 다수의 신학자들도 경륜적인 삼위일체에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00 목사 등 일부 이단 감별사들과 그분들께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관점을 양태론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런 모습은 심지어 이곳 싸이트 내에서도 관찰됩니다. 저는 이 짧은 글이 ‘경륜적인 삼위 일체에 있어서의 위격간의 동일시’ 문제를 성경대로 균형있게 이해한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후자에 해당되는 분들은 위 다른 신학자들의 관점과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일곱 영이 어린양의 일곱 눈”(계5:6) 이라고 말씀한 성경본문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묵상과 기도제목으로 삼아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 눈도 열어 주사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하소서(엡1:17-18)!